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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라는 그릇, 한계와 허무도 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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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다녀올게."
이 말을 실제 삶에서 이해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어릴 땐 별다른 목적 없이 걷는 일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주변에 '산책'이라는 단어를 쓰며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놀러 나간다'라거나 '운동하러 간다'라고 했을 뿐. '산책' 같은 단어는 책이나 영화 속에서만 봤던 단어였다. 성인이 된 지금에야 종종 산책을 한다. 생각을 정리할 때,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등 그 이유는 다양하다. 단어가 지칭하는 일이 내 일상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단 걸 돌아보면 언어란 과연 얼마나 실재를 담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빠진다.
극단적 회의주의자인 고대의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뭔가가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누군가 그것을 인식한다 해도 그것을 전할 수 없다." 이 세계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근원이 존재하지 않고, 설사 절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 해도 인간이 가지는 인식능력의 한계 때문에 보편적인 지식이 포착되지 않으며, 설사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전달 수단인 '언어' 자체가 사물과 어떠한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는 불완전한 존재라서 실재를 전달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천 혹은 수만 개의 단어를 사용하며 불편함 없이 언어를 구사하며 살아간다. 그런 탓인지 언어는 마치 가장 효율적이고 적확한 소통 수단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언가를 단어 하나, 문장 하나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우엔 언어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 왜냐하면 고르기아스의 말처럼 언어는 필연성보다는 자의성을 토대로 만들어지고, 사람마다 단어와 관련된 각자 다른 경험을 갖고 있기에 단어는 기본적인 의미를 제외하고는 흐릿한 경계를 갖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언어의 한계에 갸우뚱해 보는 오늘엔 이렇게 이야기해 보고 싶다. 사전적(보편적) 의미로서 언어는 한계가 있다고 해도, 끊임없이 문장과 이야기를 만들고 또 읽어냄으로써 다양한 삶을 재현할 수 있다고 말이다. 글, 그림, 영상, 어떤 도구로든 텍스트를 만들고 '우리 이렇게 이해해 보는 건 어때?' 끊임없이 제안하면서. 어쩌면 예술이란 생(生)의 가치나 목적을 다 알아차리기에는 한 사람의 생이 너무 짧기에 탄생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답답할 때 책 속에서 내 마음과 같은 문장을 발견하거나, 글로 무언가를 표현하거나, 좋은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관점과 위안을 얻는 행위는 뚜렷하지 않은 가장자리들에 대항하는 일이지 않을까.
최근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봤다. 평행 우주를 넘나드는 인물들의 변화무쌍한 이야기. 대립의 축을 이루는 두 인물 중 한 인물은 모든 경우의 수를 경험한 뒤 모든 게 부질없다는 '허무'에 다다르려 한다. 반대로 다른 한 인물은 같은 걸 겪었어도 단지 '딸을 끝까지 사랑'할 뿐이다. 그러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다정함을 보여줘(Please, be kind)"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다정하자니, 그토록 평범한 문장은 영화라는 텍스트 속에서 전혀 다른 옷을 입었고 나는 그제야 허무 대신 다정함을 택하는 삶에 마음이 기울었다. 삶과 허무… 어려워 보여도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다. 당신은 허무를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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