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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이 죽고 태어나는 경험이 붐비는 곳,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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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꺼내 보는 '다시 본다, 고전'이 두 번째 시즌을 엽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마다 글을 씁니다.
어떤 책은 독자를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줄 때가 있다. 반드시 이해하고 말겠다고 다짐하지만 다가갈 때마다 늘 쫓겨나는 기분을 들게 하는 책, 바로 모리스 블랑쇼(1907~2003)의 '문학의 공간'이다. 그런 책을 만날 때면 우리는 우회로를 택한다.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면 그가 쓴 글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블랑쇼는 이마저도 쉽지 않다. 레비나스, 바타이유와 절친이었으며 푸코, 들뢰즈, 데리다 같은 현대 철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사람. 프랑스의 68혁명을 지지하는 정치 활동에 참여했고 1968년 이후에는 은둔하며 글쓰기에만 몰두했던 사람. 이게 전부다. 사진도 거의 남아 있질 않다. 레비나스와 찍은 젊은 시절의 사진 한 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의 얼굴도 모를 뻔했다. 신비한 책의 신비한 저자이다.
운 좋게도 한 가지 일화가 전해지는데, 블랑쇼가 80세에 한 시사잡지에 실은 글 덕분이다. 그는 스무 살 무렵, 친구 레비나스의 권유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고 지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1933년 하이데거는 나치에 협력하는 행태로 두 사람에게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사유의 위대한 순간에 우리들에게 가장 고귀한 질문, 존재와 시간으로부터 온 질문을 던지도록 초대하던 바로 그 글과 언어를 하이데거는 히틀러를 위해 투표할 것을 호소하기 위해서 (…) 다시 사용했다.”
이 철학자의 행보는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는 말할 것도 없고 죽음의 수용소로 끌려갈 위기에 처한 레비나스의 가족을 탈출시켰던 블랑쇼에게도 깊은 상흔을 남겼다. 사랑이 깊으면 환멸도 깊기 마련이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하이데거식의 죽음론을 집요하게 문제 삼는다. 그것도 하이데거가 그토록 좋아했던 릴케와 톨스토이를 인용하면서 말이다.
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은 오직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본래적인 사건’이라고 선언했다. 인간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떠올리며 유한자임을 깨닫고 그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 결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물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나의 죽음의 중요성에 몰두하느라 타자의 죽음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영향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은 파울 첼란의 시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나치 협력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첼란은 직접 쓴 시 한 편을 건네며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길 원했지만 하이데거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3년 뒤 시인은 센강에 몸을 던졌다. “용서받지 못할 일에 대해 끝내 용서를 청하지 않은 그의 거부가 첼란을 절망 속에 몰아넣었고 아프게 만들었다”고 블랑쇼는 탄식했다. 하이데거는 타자의 말에 응답할 줄 모르고 타자의 죽음도 영향 받지 않는, 정말이지 대단히 독립적인 실존이었다.
아름답고 난해한 이 책에서 가장 크게 메아리치는 것은 이 오만한 실존에 대한 저항이다. 블랑쇼는 ‘나는 나의 죽음을 절대 경험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이미 우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메노이케오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블랑쇼는 키릴로프와 아리아의 예를 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에 나오는 청년 키릴로프는 신이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만든 환상의 산물이라고 여기는 무신론자이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며 신이 없다는 것과 인간은 자유 의지로 죽음과 결연히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청년이 의기양양하게 죽음과 만나려는 순간, 그가 맞이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부재이다. 그는 죽음을 정복하려는 찰나에 사라졌다.
아리아는 고대 로마의 귀부인이다. 남편이 모반죄로 황제의 자결 명령을 받고 두려움에 떨자 아리아는 대담하게 단도를 자기 가슴에 깊이 찔렀다가 뽑아 남편에게 주면서 말했다고 한다. “전혀 아프지 않군요.”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결을 고대 로마에서는 ‘고귀한 죽음’이라고 불렀다. 아리아의 손녀가 전한 이 일화는 로마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고귀한 죽음의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일화는 죽음의 낯선 심연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아리아는 몹시 훌륭하게 죽는다. 끝까지 죽음에서 돌아선 채 “삶을 향하여” 있는 죽음. 침착하고 절도 있는 방식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는 죽음. 이 고귀한 죽음에는 죽음이 없다. 죽음의 순간을 예의바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 끝까지 인간적 품위를 지키려는 삶의 욕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기 죽음을 향해 홀로 달려가는 존재’일 때만 본래적일 수 있다는 생각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인간은 자기 죽음과 제대로 만날 수조차 없다.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죽음 자체는 체험되지 않는다. 죽음이 덮쳐와 그를 ‘다른 누군가’로 만들 뿐이다. 블랑쇼는 이것을 ‘비인칭의 죽음’이라고 부른다. 나(1인칭)와 너(2인칭)도 아니고 그/그녀(3인칭)도 아닌 누군가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존재했었으나 지금은 없는’ 아무도 아닌 누군가는 비인칭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항상 나의 바깥 경험이다.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이 사건이 체험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기억해줄 사람이 없는 죽음은 우리를 비통에 빠뜨린다. 그래서 에밀리 디킨슨도 “작년 이맘때 나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시에서 그토록 궁금해한 것이다. “누가 나를 가장 그리워하지 않을까?”(그들이 날 그리워할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죽음을 상상하며 죽은 뒤에도 영혼이 남아있을지 그 영혼은 어디로 갈지 궁금해한다. 그러나 더 절실하게 궁금한 것은 시인과 같다. 누가 제일 슬퍼하고 그리워할까? 언제까지나 나를 기억할까? 혹은 우리 강아지는 누가 데려갈까? 등등이다.
우리는 자기의 죽음을 상상하면서도 죽음 자체가 아니라 타자들을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더 고통스러워한다. 때로 어떤 이들은 다른 이를 구하려고 죽기도 한다. 물론 그들이 살린 사람이 영원히 살지는 못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인간은 타자를 ‘위해서’, 즉 ‘대신해서’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력함을 넘어서, 인간은 타자를 “향해서” 죽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 내가 아닌 것이 되는 비인칭의 죽음이라면 타자의 죽음은 내게 가장 격렬하게 닥쳐오는 비인칭의 경험이다. 타자의 죽음과 마주한 순간 우리는 근원적 전복에 처하게 된다. 고통을 통과하며 지금까지의 나와 달라지고, 다른 존재로 바뀐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이 이런 비인칭성의 경험들로 붐비는 곳이라고 여겼다.
카프카가 ‘문학적 전복’에 관해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읽어보자.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이란 우리를 몹시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처럼, 모든 사람을 떠나 인적 없는 숲속에 추방당한 것처럼, 자살처럼 다가오는 책이다.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또 번번이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문학의 공간이란 그런 곳이다.
종종 사는 데 지쳐 힘이 빠질 때 바닥에서 나를 다시 끌어올리는 것은 언젠가 죽을 존재라는 유한성의 자각이 아니라 오래된 죽음에 대한 기억들이다. 학생시위가 연일 계속되던 1991년 5월의 어느 토요일,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한 학생이 시위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균관대 불문과 3학년 김귀정. 나와 내 친구들이 있던 윗골목에서였다. 영정 사진으로 처음 봤던 여학생의 말간 얼굴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나는 그 불문과 여학생의 영원히 앳된 얼굴을 떠올리며, 그 애와 함께 블랑쇼를 읽고 문학의 공간을 힘내서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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