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부자들 배만 불려준 로빈 후드 라덕연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대출을 꿈도 꿀 수 없는 수백만 미국인에게 대출을 해줘 주택 보유란 꿈을 실현하도록 도와줬다.”
2007년 4월 미국 2위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업체 ‘뉴센추리파이낸셜’ 창업자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하며 꺼낸 말이다. 배경은 이랬다. 연준(Fed)이 2001년 ‘닷컴’ 버블 붕괴에 따른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금리를 1%대까지 내리자, 저금리발 유동성은 주택 시장으로 몰려갔다. 뉴센추리파이낸셜은 저소득층(서브프라임)을 대상으로 공격적인 영업에 나섰다. 대출 신청서 소득란을 비워 둔 70대 여성에게 3억 원 넘는 돈을 빌려줄 정도였다.
사실 대출은 못 갚아도 상관없었다. 이런 모기지는 리먼브러더스 같은 투자은행(IB)이 사갔고, IB는 모기지 수천 개를 묶어 주택저당증권(MBS)으로 상품화해 전 세계에 팔았다. 각 부도율이 10%인 모기지 3개로 MBS를 만든다고 해보자. 보험사 같은 선순위 투자자는 모기지 3개가 다 부도가 나야 돈을 잃는 구조다. 이론상 손실확률은 0.1%. 쓰레기 모기지 덩어리가 안전자산으로 변하는 연금술이었다. 하지만 금리가 오르자 집값은 폭락했고, MBS는 휴지 조각이 됐고, 금융위기가 터졌다. 수백만 미국인이 하루아침에 집을 잃었다. 그런데 뉴센추리파이낸셜 창업자는 책임을 느끼기는커녕 탐욕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것이다.
아득한 서브프라임 일화가 떠오른 건, ‘SG증권발 주가 폭락 사태’ 배후로 지목된 라덕연 호안 대표의 궤변 때문이다. 그는 전주 돈을 받아 삼천리 등 8개 종목 주식을 집중 매수한 데 대해 “로빈 후드 프로젝트”라고 했다. 로빈 후드는 부자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이에게 나눠 준 영국 의적이다. 상속세를 줄이고자 대주주가 주가를 누르는 ‘저평가’ 자산주를 사서 주가가 오르면, 대주주는 손해 보고, 전주·개미는 돈을 버니 의롭지 않냐는 것이다. 또 오너 일가가 기업가치에 걸맞은 세금을 내기에 조세 정의에도 부합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하지만 정작 라 대표는 중견기업 회장, 의사 등 부유층 이익에만 복무했다. 그는 이들 '큰손'이 투자한 조 단위 자금으로, 유통 물량이 50%도 되지 않는 8종목 주식을 긁어모았다. 또 기존 VIP들의 환매 물량은 신규 투자자가 받아가는 식으로 조율했다. 통정매매다. 언제, 얼마에 팔고 떠날지 모르기에, 주가 관리를 방해할 수 있는 일반 개미들은 철저히 배제한 셈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작전 세력의 전형적인 개미 털기”라고 했다.
라 대표 일당은 이렇게, 3년 동안 많게는 10배 가까이 주가를 끌어올렸다. 업계에선 일당이 8종목 몸집을 계속 불려 ‘코스피200’ 지수 등에 편입시키는 방식으로 물량을 고점에서 기관투자자에게 팔고 나가려고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연초 "삼천리ㆍ대성홀딩스가 5월 코스피200에 편입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대주주 대량 매도가 없었다면, 국민 쌈짓돈을 굴리는 연기금ㆍ자산운용사 등이 ‘설거지’ 타깃이 됐을 수도 있는 셈이다.
라 대표를 비롯한 주가조작 핵심 인물들은 회삿돈으로 빌린 람보르기니 등 수퍼카 여러 대를 SNS에 자랑했다. 또 서울 송파구 롯데타워 '시그니엘'에 작전 본부를 마련하기도 했다. 임대료만 보증금 5억 원, 월세 2,500만 원에 달하는 곳이다. 여러모로 가난한 자를 돕는 의적보다는, 부정 축재한 재산으로 호의호식하는 탐관오리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