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무료 팔찌 미끼로 기부 강요” vs “어릴 때부터 나눔 경험"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미아방지 팔찌 무료 증정’
커다랗게 적힌 이 문구 아래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과 책상 하나, 컴퓨터(PC)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지난 1일 아이들과 서울의 한 대형 키즈카페에 간 A(43)씨. 여섯 살 둘째는 어느새 '팔찌 부스' 앞에 가 있었다. ‘키즈카페에서 해주는 서비스인가’ 생각하며 아이에게 다가간 A씨는 "팔찌를 무료로 준다"는 직원의 말에 팔찌에 새길 아이 이름과 부모 연락처를 적었다.
그러자 직원은 “팔찌가 만들어지는 동안 설명하겠다”며 갑자기 책자를 꺼내더니 ‘조혼으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소녀들’ 얘기를 시작했다. 한참 이어진 설명 끝에 A씨는 “아내가 다른 단체에 후원하고 있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아이 이름으로 하라”며 아이에게 “ㅇㅇ야, ㅇㅇ 이름으로 어려운 친구 도와주면 좋겠지?”라며 권유를 계속했다. 일회성 기부는 불가능하다고 해, 결국 매달 2만 원의 정기후원 신청서를 썼더니 “2만 원은 지원 물품이 적다”고 해 3만 원으로 금액까지 올렸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서야 직원은 아이에게 팔찌를 줬다. 그는 “시간제로 요금을 내는 키즈카페라 더 이상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 나중에 취소할 생각으로 신청서를 썼다”며 “아이가 옆에 있으면 교육적으로도 거절하기 힘든 점을 악용해 기부를 강요하는 것 같아 되레 기부 거부감만 커졌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의 한 아쿠아리움을 찾았던 B(37)씨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아쿠아리움에 들어서자마자 ‘팔찌 무료 증정’이라고 크게 적힌 부스가 있었고 아이가 팔찌를 갖고 싶다며 손을 잡아끌었다. 하지만 근처에 가서 다른 부모에게 기부를 권유하는 것을 보곤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그는 “기부단체라는 걸 감춘 채 팔찌로 아이를 유혹하는 것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다”며 “시간적 여유가 될 때 자발적으로 후원 설명을 듣는다면 모를까 가족 나들이 중 갑자기 붙잡히고 싶지는 않았다”고 했다.
‘무료 팔찌’ 기부 캠페인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은 장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약 10년 전부터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스티커 붙이기’ 기부 캠페인이 새로운 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나들이를 나왔다가 아이와 함께 기부를 하는 시민들도 있는 반면, 강요에 가까운 기부 방식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시민들도 있다.
공개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시민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기부를 유도하는 것 자체는 외국에서도 많이 사용하는 기부 방식 중 하나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노연희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잠재적 기부자는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금 조직이 다양한 방식을 쓰는 것”이라며 “어느 단체인지 제대로 알리지 않고 모금을 권유했다면 그 단체의 문제일 뿐, 거리 모금 자체는 여러 모금 전략 중 일부”라고 말했다.
A씨가 어쩔 수 없이 후원신청서를 쓴 비영리단체 관계자는 무료 팔찌로 관심을 끄는 방식에 대해 “아이들이 나눔에 참여하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기부를 하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는 사람도 굉장히 많다”고 주장했다. 이재현 NPO(비영리단체)스쿨 대표는 “학교에서 나눔을 따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라 이런 캠페인마저 없다면 아이들이 나눔을 보고 배울 데가 없는 건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는 “기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아니라 눈길을 끄는 마케팅 요소로 꼼짝달싹 못 하게 한 후 기부신청서를 내밀면 기부 경험을 안 좋게 하는 것”이라며 “그 작은 경험의 잔상이 크게 남아 기부단체 자체를 꺼리거나 기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거리 모금에서는 ①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했는지 ②자유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지가 핵심 요소라고 황 이사는 설명했다. 하지만 둘 다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사결정을 재촉하며 기부를 안 하면 ‘나쁜 사람’을 만드는 방식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교묘한 마케팅과 죄책감 유발을 통해 후원자를 모집하는 방식은 대부분 '마케팅 대행사'에서 비롯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약 10년 전부터 마케팅 대행사가 비영리기구를 대신해 거리에서 후원자 모집 활동을 해왔다. 자체 인력만으론 많은 기부자를 접촉하기 힘든 비영리기구들이 외부 대행사에 일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후원자 모집 성과에 따라 돈을 받는 대행사가 비영리단체의 핵심 가치인 '공동체 의식' '시민 의식' 등을 깊이 이해하고 모금 활동을 하는지가 문제다. 실제로 이런 대행사 근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시민들은 우리가 자원봉사자인 줄 알지만, 실제로는 후원자 1명을 모집하면 후원금의 2, 3배를 인센티브로 받는다”, “우연히 말 잘한다고 스카우트돼 일하게 됐는데 후원받는 걸 ‘세일즈’라 부르더라"는 후기를 온라인에 올리기도 한다. 대행사와 캠페이너들이 후원자를 바라보는 관점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최근 한 채용사이트에 올라온 대행사의 캠페이너 채용공고에선 "후원자 모집 업무를 주 5일 오후 3~4시간 동안 하며, 급여는 100% 인센티브제. 평균 월 200만~250만원 이상 수령. 월 500만원 이상 수령하는 근무자도 있다"고 소개했다. 대행사의 캠페이너가 후원금을 따내면 팀장도 수당을 받는 다단계 마케팅 방식 등이 사용된다는 것도 이미 2015년부터 언론 보도로 드러난 바 있다.
이재현 대표는 “마케팅 업체 모금이 더 발달돼 있는 외국에서는 단체와 마케팅 업체가 모금의 명분과 의미를 개발하기 위해 함께 숙고하며 ‘협업’한다”며 “하지만 우리나라는 ‘돈 줄 테니까 후원자 모아주세요’라는 단순 대행”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마케팅 업체 캠페이너들이 영업적 기술은 고도로 발달돼 있는 반면 단체의 철학과 역사, 경험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은 비극”이라고 꼬집었다.
황신애 이사 역시 “단체는 '철학'으로 일하지만 대행사는 '성과' 중심으로 일하다보니 단체가 모금 원칙을 아무리 당부해도 현장에선 적용되기 힘든 것 같다”며 “단체 입장에서는 제대로 훈련된 대행사를 만나기도 어렵다”고 말했다.
이처럼 논쟁적인 거리 모금 방식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이재현 대표는 “대행사에 맡기면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 때문”이라며 “가입 후 1년 내 탈퇴한다 해도 몇 개월간 캠페인을 하고 나면 후원자 몇 백 명이 모이니까 단체들이 거리 모금을 놓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빠른 성과보다는 느리지만 건강한 방식으로 기부 방향이 전환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단체의 목표와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 등을 충분히 설명해 후원자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기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현 대표는 “건강한 모금은 기부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그 가치에 합의하는 것”이라며 “기부 문화 개선을 위해 비영리단체 연대조직이 '길거리 모금 공동 규범'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신애 이사는 “공동체 의식을 일깨우는 것은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이라며 “기부 관련 정보를 충분히 커뮤니케이션하면 어린이들에게도 교육이 될 수 있고 부모도 적극적인 대화 속에 기분 좋게 기부를 선택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