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맞고도 카메라 놓지 않은 일본 기자…유품 15년 만에 가족 품으로

입력
2023.04.27 17:05
수정
2023.04.27 17:11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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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샤프론 혁명 취재 중 피살

2007년 미얀마 양곤에서 일본 기자 나가이 겐지가 미얀마군의 총에 맞고 쓰러지던 모습. 그는 숨지는 순간까지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양곤=로이터 연합뉴스

2007년 미얀마 양곤에서 일본 기자 나가이 겐지가 미얀마군의 총에 맞고 쓰러지던 모습. 그는 숨지는 순간까지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양곤=로이터 연합뉴스

#. 미얀마 양곤 중심가에서 시위대가 반군부 구호를 외친다. 병사들을 가득 태운 군용 트럭이 나타난다. 이 장면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고 있던 사람이 렌즈를 자기 얼굴 쪽으로 돌리며 말한다. “군대가 방금 왔습니다. 중무장을 하고 있어요.” 비디오카메라를 켠 채로 달리는 건지, 화면이 거세게 흔들린다. 이내 영상이 끝난다.

2007년 9월 미얀마군의 총에 맞아 숨진 일본 언론인 나가이 겐지(당시 50세)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날의 진실을 은폐하려 한 미얀마 군부는 그의 카메라도 감췄다. 미얀마 독립 언론 ‘버마의민주목소리(DVB)’가 최근 카메라를 입수해 여동생에게 돌려줬다. 나가이가 목숨을 걸고 찍은 마지막 영상은 26일 태국 방콕에서 공개됐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일본 분쟁지역 전문 통신사 APF의 프리랜서 기자였던 나가이는 미얀마 군부 독재에 저항한 ‘샤프론 혁명’ 시위 현장을 취재 중이었다. 그는 혼비백산해 달아나는 시위대의 모습을 담기 위해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당시 이 모습을 로이터통신이 촬영해 보도하면서 나가이의 기자 정신이 세계에 알려졌다. 로이터통신 사진기자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나가이가 촬영한 시위 영상은 공개되지 않았다. 미얀마 군부는 나가이의 휴대폰, 수첩 등 유품을 유족에게 전달하면서도 카메라는 돌려주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유족이 진상 규명과 함께 카메라 반환을 요구했지만 무시했다.

26일 태국 방콕에서 미얀마군에 피살된 나가이 겐지가 숨지기 직전 촬영한 영상이 공개되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26일 태국 방콕에서 미얀마군에 피살된 나가이 겐지가 숨지기 직전 촬영한 영상이 공개되고 있다. 방콕=로이터 연합뉴스

군부는 “총격은 실수였고, 부적절한 시간에 부적절한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며 책임을 나가이에게 돌렸다. 일본 후지TV가 입수한 영상에 미얀마군이 1m 남짓한 거리에서 그를 조준 사격하는 듯한 장면이 포착됐지만, 군부는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사건은 점점 잊혔다.

미얀마 언론사가 나가이의 카메라를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DVB는 “2021년 어렵게 카메라를 입수했다”면서도 관계자들의 안전을 위해 구체적인 경로는 밝히지 않았다.

이번 영상 공개는 15년이 지난 뒤에도 바뀐 게 없는 미얀마의 엄혹한 현실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나가이의 동생 노리코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미얀마에서 2021년 또다시 쿠데타가 발생했습니다. (오빠의) 영상을 통해 세계가 미얀마에서 또다시 벌어지는 폭력에 관심을 갖고 조치를 취하기를 바랍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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