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발달장애 아들 취업해 가족 모두 행복"... 장애인 표준사업장·부담금 늘려야

입력
2023.04.27 04:30
13면
구독

[장애인, 일자리가 없다] 4회
장애인 사업장에서 희망을 본다

자폐성 발달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이석주(25)씨는 강원 춘천에서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사회적기업 베어베터까지 왕복 3시간이 걸리는 출퇴근을 매일 되풀이한다. 그는 베어베터에서 하루 4시간씩 빵과 과자, 명함을 만들고 이를 주문한 기업들에 배송하는 일을 한다. 아침 6시 30분 기상해 혼자 ITX 기차를 타고 서울 청량리역까지 이동한 뒤 지하철을 갈아타고 성수역에 내려 7분가량 걸어간다. 만만찮은 출퇴근 길이지만 석주씨는 일할 수 있다는 기쁨에 고된 줄 모른다.

석주씨보다 부모와 누나 등 가족들이 더 기쁘다. 아버지 이영수(61, 가명)씨는 "아이가 일을 하다니, 옛날에는 꿈도 못 꾸던 일"이라며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이전까지 아버지의 소원은 "아들보다 하루 더 사는 것"이었다. 그는 "어려서 석주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돌발행동을 해서 항의를 많이 받았다"며 "처음에는 발달장애라는 것을 몰라 아이를 때리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항상 뒤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대기하며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 많았다"고 덧붙였다.

결국 그는 아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려고 서울에서 춘천으로 이사해 떡집을 한다. 그러다가 인터넷으로 알게 된 베어베터에 취직 후 달라진 아들을 발견했다. 아버지는 "석주가 직장에 나가면서 친구를 사귀고 소통 능력도 좋아졌다"며 "90만 원 남짓한 월급을 타면 저금도 하고 부모에게 밥도 사준다"며 웃었다. 달라진 석주씨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을 묻자 많은 것을 함축한 한마디가 돌아왔다. "그저 봄이죠."

사회적기업 베어베터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 이석주씨가 기업에서 주문한 명함 배송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베어베터 제공

사회적기업 베어베터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 이석주씨가 기업에서 주문한 명함 배송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베어베터 제공

석주씨 사례에서 보듯 장애인들에게 직장은 단순히 돈 버는 곳 이상을 넘어 사회 구성원으로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공간이다. 그만큼 장애인들의 일자리 확대는 시급한 과제다. 장애인 일자리를 늘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직접 고용하는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늘리거나 미고용 부담금을 늘리는 방법이다.

50인 이상 기업은 전체 직원의 3.1%에 해당하는 장애인을 의무 고용해야 하고, 이를 채우지 못하면 장애인 고용법에 따라 부담금을 낸다. 그런데 부담금은 기준이 최저임금의 60%로 정해져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장애인을 고용하는 것보다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부담금을 내는 것이 더 낫다. 오히려 잘못된 기준이 미고용을 부추기는 셈이다. 따라서 장애인 표준사업장 확대와 함께 부담금 기준을 최저임금 이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장애인 표준사업장은 최근 대기업 중심으로 조금씩 늘고 있다. 대기업 중 가장 앞선 곳은 SK다. SK는 2016년 SK하이닉스 산하에 설립된 행복모아를 시작으로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실트론 등에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 8개 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발달장애인과 신체장애인을 고용해 제조, 세탁, 차량관리, 미용, 카페 운영 등 다양한 업무에 투입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장애인 고용을 위해 설립한 자회사 행복모아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들이 반도체 공장용 방진복을 제작하고 있다. SK 제공

SK하이닉스가 장애인 고용을 위해 설립한 자회사 행복모아에서 일하는 발달장애인들이 반도체 공장용 방진복을 제작하고 있다. SK 제공

특히 436명의 발달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고용한 행복모아는 충북 청주와 경기 이천 사업장에서 SK하이닉스의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방진복 제조와 세탁을 하고, 구내식당에 공급하는 빵을 만든다. 안민 행복모아 대표는 "매일 경증 장애인은 8시간, 중증 장애인은 오전, 오후로 나눠 각 4시간씩 근무한다"며 "연봉은 1,500만 원 선"이라고 말했다.

안 대표는 장애인뿐 아니라 사회를 위해서도 장애인 표준사업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장애인 표준사업장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보여줘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장애인들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우려해 표준사업장 마련을 고민하는 기업들이 있다"며 "장애인들도 일을 할수록 숙련도가 향상된다"고 설명했다.

SK는 주요 대기업 중 유일하게 그룹 전체가 장애인 의무 고용률 3.1%를 넘겼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최태원 SK 회장이 2019년 5월 사회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사내 행사를 개최했는데 참석한 김정호 베어베터 대표로부터 "장애인 고용 의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따끔한 지적을 받았다. 여기에 자극받은 최 회장은 바로 개선을 지시했고 1년 만에 주요 관계사가 의무 고용률을 채운 뒤 현재 그룹 전체가 장애인 고용률 3.3%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삼성전자 희망별숲, LG전자 하누리, 포스코 휴먼스, 롯데제과 스위트위드, 오뚜기 프렌즈, 아모레퍼시픽 위드림 등 많은 기업들이 112개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네이버, 카카오, 넥슨 등 벤처로 출발한 기업들도 2008년부터 속속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설립했다.

최근 주목받는 것은 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이다. 지분투자형은 장애인을 직접 고용할 여력이 되지 않은 기업들이 지분을 투자해 장애인 일터를 만들면 지분만큼 장애인 고용을 인정해 주는 사업장이다.

장애인 고용 확대를 위해 새롭게 떠오르는 지분투자형 사업장 브라보비버 인천. 브라보비버인천 제공

장애인 고용 확대를 위해 새롭게 떠오르는 지분투자형 사업장 브라보비버 인천. 브라보비버인천 제공

대표적 지분투자형 표준사업장으로 지난해 3월 출범한 브라보비버 대구는 라인플러스, 매일유업, 한국투자증권 등 10개 사가 지분 참여를 했다. 이곳은 장애인 55명을 고용해 과자, 커피를 만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브라보비버는 인천과 경기에 추가 사업장을 마련해 각 40~50명의 장애인을 채용할 계획이다. 브라보비버 인천과 경기에 KB국민은행, 카카오뱅크, 세아제강 등 24개 기업이 지분을 투자했다.

전문가들은 장애인 일자리 확대를 위해 표준사업장, 지분투자형 사업장 및 미고용 시 부담금 확대 등이 종합적으로 적용돼야 할 것으로 본다. 한국노동연구원의 조혁진, 명숙, 고태은 연구원은 '장애인의 지속가능한 노동을 위한 정책과제' 보고서에서 "장애인들이 일을 통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도록 고용 부담금 기준을 기업별 상시 근로자의 평균 임금으로 재설계하고, 민간 위주의 장애인 고용 관련 서비스 전달체계를 공영 방식으로 개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연진 IT전문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