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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네가 더 잘하니까"…상사의 '일감 투척', 이거 괜찮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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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중소기업 신입사원 A(29)씨는 남모를 고충이 있다. 취업 준비생 시절 컴퓨터활용능력, 정보기술자격(ITQ) 등 각종 O.A(Office Automation) 자격증을 취득한 덕에 회사 내에서는 뭐 하나 못하는 것 없는 똑 부러진 직원으로 통하지만, 그는 썩 달갑지 않다. 그게 되레 자신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A씨가 각종 프로그램을 잘 다룬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하나둘씩 떠넘기고 있다. "내가 잘못해서, OO가 잘한다고 하던데, 부탁 좀 해도 될까?" 처음엔 자신의 능력이 빛을 발한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으로 부탁을 들어줬다. 그러자 부탁이 점점 늘어났다. 보통 엑셀 정리처럼 소소한 일이지만 가욋일이 쌓이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을 빼앗긴다. 이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의 1.5배가 넘는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 "내가 잘하니까 일을 맡긴다는데, 어쩌겠어요." 거절하기도 참 난감하다는 A씨의 하소연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B(33)씨도 비슷한 속앓이를 하고 있다.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 때문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심신이 지쳐 간다. 그의 업무는 매일 발생하는 회사 관련 사안을 자료로 정리해 보고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보고서를 작성해 상사에게 제출하면 끝일 줄 알았던 업무는 끝나지 않았다. 상사가 임원들에게 보고해야 하니 자신이 발표할 자료를 다음 날 출근시간까지 만들어달라고 지시하기 때문이다. 한 번 하다 보니 계속 별도의 자료를 만들고 있다. 지시를 받을 때마다 '보고서로 발표하면 안 되나', '직접 만들면 안 되는 건가' 하는 반발심이 꼬리를 물었지만 잘 보여야 하는 상사 앞에서 이런 생각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아침까지 발표용 자료를 만들려면 야근은 불가피하다. 야근으로도 부족하면 다음 날 아침 일찍 출근해서라도 완성해야 한다. 바쁜 날에는 집에서 2~3시간 쪽잠을 자고 나와 자료를 정리하기도 했다. B씨는 주변 동료들에게 "왜 직접 안 만드는지 모르겠다"고 고충을 토로하지만 차마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는 하지 못한 채 본인이나 상사의 인사이동만을 기다리고 있다.
A씨와 B씨의 고민은 내 얘기 같다고 싶을 정도로 흔한 사례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닌가'라며 직장인의 애환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직장 내에서 발생한 폭언이나 폭행, 업무 외 강요처럼 누가 봐도 심각한 사안이 아닌 듯 보여도 누구나 겪어봄직한, 어쩌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고충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당 지시는 직장인들이 겪는 대표적인 직장 내 괴롭힘 중 하나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지난달 전국의 만 19세 이상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올해 1분기 직장인 인식조사에서는 30.1%가 최근 1년간 한 번이라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한 적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18.9%가 모욕과 명예훼손을 당했고, 그다음이 부당 지시(16.9%)였다. 폭행 및 폭언(14.4%), 업무 외 강요(11.9%), 따돌림 및 차별(11.1%)이 뒤를 이었다. 지난해 4분기 조사에서는 부당 지시(16.5%)가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이기도 했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선 행위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 세 가지에 해당하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분류된다. 업무와 관련된 지시나 부탁이라도 상하 관계가 분명하고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데도 부여한 업무가 과도하고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면 직장 내 괴롭힘 혹은 갑질이 될 수 있다.
사무직은 구성원 간 업무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기도 한다. 업무를 부서에 할당하고 부서 내부에서 구성원에게 유연하게 업무를 나누거나 협업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업무 분장이 명확한 상황에서 업무상 지위를 활용해 타인에게 자신의 업무를 전가한다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
A씨나 B씨의 사례로 보자면, 이들에게 업무를 전가한 선배와 상사는 누가 봐도 명백하게 본인의 일이 맞는데도 그 일을 떠넘긴 거라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A씨가 대신한 엑셀 작업 결과물을 선배가 자신의 이름으로 상사에게 제출한다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상혁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노무사는 "특정 업무가 특정인의 고유한 업무라는 것이 전제가 됐을 때 상사가 자신의 업무를 타인에게 시키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명확하게 업무가 나뉘어 있는 상태라면 업무 전가가 두 사람의 사례처럼 반복적으로 이뤄지는지도 짚어 봐야 한다. 부당한 업무 지시는 행위가 이뤄지는 환경과 사실관계를 따져서 직장 내 괴롭힘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에 일회성의 업무 지시라면 괴롭힘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커피 한 잔 살게 이것 좀 해 줄래?"라는 사적인 부탁이 대표적이다.
이런 부탁이 반복된다면 아무리 괴롭힐 의도가 없더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권두섭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대부분 의도가 없었다거나 사적인 부탁이라고 변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목적이나 의도성은 중요하지 않다"며 "아무리 가까운 관계여도 업무 전가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면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선배나 상사의 업무 전가가 법적으로 규정된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내 업무로 인해 구성원들 간에 갈등이 발생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업무상 갈등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악화될 가능성이 높고, 갈등이 있다는 것 자체가 노동자 본인은 물론 회사의 손해로도 이어져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노동전문가들은 회사가 갈등 상황을 신속히 인지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한다. 갈등을 조기에 중재하지 못하면 자칫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이어져 해결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스스로도 회사에 고충을 털어놓아야 하고, 회사는 그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
윤지영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업무상 갈등이 발생했다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 아닌 조직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며 "괴롭힘으로 분류되지 않더라도 회사가 적절하게 고충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혁 노무사도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닌 도의적인 문제라면 회사에서 고충처리위원회 같은 내부 절차에 의해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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