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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저잣거리의 말 달리던 선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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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1896.4.28~1948.12.10)은 1910년대 일본 유학시절 일본 최초 페미니스트 잡지로 알려진 ‘세이토(靑踏)’ 등을 읽으며, 여성으로서 자신이 겪어온 억압의 정체를 자각했다고 한다. 10대 말인 1914년 문예지 ‘학지광’에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기 위해 장려되는 부덕”일 뿐이며, 현모양처만 좋은 여성은 아니라는 게 요지였다.
시인 최승구와의 자유연애와 사별, 외교관 겸 변호사였던 김우영과의 결혼과 이혼, 1920년 결혼 당시 김우영에게 내건 시어머니와의 별거 등 조건과, 이혼하던 해인 1930년 ‘삼천리’에 발표한 ‘실험결혼론’, 자신의 출산·육아 경험을 토대로 쓴 ‘모성’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 이혼 직후 강연과 인터뷰 등을 통해 주장한 ‘자유연애’, 이혼의 빌미가 된 외도에 대한 변론….
그는 남자들은 외도와 축첩을 거리낌 없이 하면서 여성에게만 정절을 강요하는 남성사회의 위선과 이중성을 비판하며 결혼한 여성에게도 다른 상대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이 있으며,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닌 한낱 취미일 뿐”이라는, 100년 뒤인 지금도 논란이 될 만한 주장들을 서슴없이 했다. 거리에서 그를 마주치면 예사로 손가락질하거나 심하면 휴지를 뭉쳐 던졌을 만큼, 그는 유명한 ‘시대의 탕녀’였다. 또 그는 3·1운동 직후 옥고를 치르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독립운동가를 도와 조선총독부의 상시적인 감시를 받던 ‘불령선인’이었다. 한마디로 그는 당대 한반도 여느 지식인보다 앞선 지식인이자 실천가였고, 문학과 그림 특히 매체에 기고한 에세이로 시대와 불화한, 대담하고 고독한 선구자였다.
만년의 그는 벗들을 잃고, 가난과 실어증을 비롯한 여러 질병으로 오갈 데 없이 지내다 서울의 한 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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