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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중개사를 믿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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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전세사기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공인중개사 또한 도마에 올랐다. 건축업자와 가짜 임대인(바지사장) 등이 짜고 대출금·전세보증금을 챙긴 뒤 깡통전세만 남기는 과정에 공인중개사의 공모 내지 방조가 있기 때문이다. 전세 매물에 근저당이 설정돼 있는데도 ‘시세가 훨씬 높다’거나 ‘집주인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세입자를 안심시켜 계약을 유도한 건 결국 공인중개사였다. 임대사업자인 집주인이 보증보험에 들지 않았는데도 ‘보증보험 의무 가입자’라고 눙치는 일도 많았다. 피해자 입장에선 공인중개사를 믿은 게 죄냐고 할 만하다.
□ 그런데도 책임을 묻기는 쉽지 않다. 공인중개사의 고의나 과실을 피해자가 입증해야 하는데, 애초에 법이 규정한 의무가 모호하다. 세입자가 보증보험을 들고도 집주인의 세금체납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빌라왕 사례만 봐도 공인중개사는 세금체납 여부를 알 길도 없고 알려줄 의무도 없다. 이달부터 세입자가 체납 정보를 확인할 수 있도록 미납국세열람제도가 신설됐지만 여전히 공인중개사의 의무는 아니다. 전세사기 한패라는 게 확인되지 않는 한 형사처벌이나 손해배상을 피할 여지가 크다.
□ 경찰은 20일 전세사기에 대해 범죄단체조직죄 적용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공인중개사가 신용정보시스템 등을 통해 임대인의 세금체납 정보나 주택의 선순위 권리관계를 열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공인중개사법 개정안을 발의할 방침이다. 살 곳을 잃고 빚만 떠안게 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뒤늦은 제도 개선에 한숨이 나온다.
□ 병행되어야 할 것은 업계의 자정 노력이다. 이종혁 한국공인중개사협회장은 지난 1월 “협회는 회원자격을 박탈하거나 업무를 정지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제도적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국가자격시험으로 배출된 전문직으로서 이렇게 안이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공인중개사를 걸러내고 퇴출시킬 자정 시스템이 필요하다. 불신을 방치하고 공범으로 낙인찍히면 더 이상 공인중개사를 찾지 않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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