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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와 이백, 11살 차 극복한 당나라판 브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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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양 동쪽에 궁이(鞏義)가 있다. 오악 중 하나인 쑹산(嵩山)과 황하로 둘러싸여 있어 함락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공고불발(鞏固不拔)이라 불렸다. 풀을 뽑는다는 발(拔)은 ‘거점을 탈취하다’라는 뜻도 있다. 기원전부터 중원의 요충지였다. 기차역에서 10㎞ 떨어진 난야오완촌(南瑤灣村)을 찾아간다.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아 택시를 타니 20분이 걸린다. 촌민이 겨우 1,700명인 마을이다. 시성으로 대우받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고향으로 알려진다. 2007년 약 290억 원을 투자해 관광지를 조성했다. 녹지를 포함해 25만㎡ 규모다.
4A급 관광지로 인정받았다. 입장료는 65위안(약 1만2,000원)으로 비싼 편이다. 화려한 대문 사이로 조각상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 선비의 형상이다. 발 밑에 돌로 만든 책이 펼쳐져 있다. 두보는 712년에 태어나 770년까지 1,50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고향에 대한 감상이 없을 수 없다. 40대 후반에 월야억사제(月夜憶舍弟)를 썼다. 전란으로 인해 뿔뿔이 헤어진 동생을 그리워하며 쓴 시다. 월시고향명(月是故鄉明)라 노래했다. 고향의 달빛이 유난히 밝다 했다. 시인에게 달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앞쪽에 시성당(詩聖堂)이 나타난다. 시인의 일생을 테마로 나눈 전시관이다. 담장 쪽으로 빼곡하게 시비가 진열돼 있다. ‘천년 세월 길이 빛나는 시인’이라 칭송한 시성천추(詩聖千秋) 아래 백옥 같은 자태다. 중국공산당 지도자이자 홍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주더의 필체다. 쓰촨 출신 주더가 1957년 청두에 있는 두보초당을 방문하고 대련을 남겼다. ‘시성’과 ‘천추’ 사이에 저(著)가 있었다. 뚜렷이 드러난다는 뜻인데 네 글자에 맞추려고 뺐다. 굳이 쓰지 않아도 모를 리 없는 시인이다. 햇볕이 스며들어 관복 차림을 또렷이 비추고 있다.
야트막한 동산 아래 탄생요(誕生窯)가 있다. 북방에는 동굴 집이 많다. 어두컴컴한 공간은 생각보다 넓다. 높이 3.5m, 너비 3.3m이며 안쪽 끝까지 16.7m다. 조각상 하나 달랑 놓였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시인이 태어난 장소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사실 두보가 궁이에서 탄생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장강 이남 출신 증조부가 현령으로 재임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근무 기간도 몇 년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 두심언도 6품 벼슬을 역임한 유명 시인이다. 신당서(新唐書)에 따르면 두심언은 수도 뤄양에서 오랫동안 봉직했다. 교류가 빈번했던 4명의 문우도 모두 뤄양에 살았다. 본가가 뤄양이었다는 사실은 꽤 그럴듯하다. 두보가 태어나기 4년 전 병사해 뤄양 수양산에 묻혔다. 두보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 모두 삼년상을 지냈다. 아버지 두한도 뤄양에서 관리를 역임한다. 두보가 동굴 집에서 태어났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어머니가 요절해 두보는 어린 시절 고모네에서 자랐다. 옆에 상원(上院)을 조성했다. 두보는 병약했는데 고모의 보살핌으로 10살이 넘자 나무에 쉽게 오를 정도로 건강해졌다. 나무에 올라 사촌동생이랑 장난치는 모습을 꾸며 놓았다. 방에는 고모에게 어리광 부리는 모형이 있다. 고모는 친아들 이상으로 두보에게 각별했던 듯하다. 어느 날 아이 둘이 동시에 병에 걸렸다. 무녀를 찾아갔더니 아이 하나를 기둥에 묶어두면 치유된다 했다. 눈물을 머금고 친아들을 묶었다.
와병 중인 말년에 쓴 오언시 장유(壯遊)가 있다. 인생의 회한을 드러낸 시로 560자에 이른다. 칠령사즉장(七齡思即壯), 개구영봉황 (開口詠鳳凰) 구절이 나온다. ‘일곱 살에 혈기 왕성한 사고를 하고, 입을 열어 봉황을 노래한다’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읊고 붓 들어 글 쓰는 장면도 있다. 아홉 살에 이미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아홉 살에 글을 쓰다’는 구령서대자(九齡書大字)와 ‘한가득 시를 짓다’는 유작성일낭(有作成一囊)이 이어진다.
나무와 잔디가 우거진 길이 나온다. 장유의 내용을 기초로 조각상을 세웠다. 장유원(壯遊園)이다. 스물이 되자 강남의 오월(吳越) 지역을 여행한다. 막내 고모가 시집간 저장성 회계까지 들렀다. 지금의 사오싱으로 1,000km가 넘는다. 스물다섯에 친구 소원명과 한단부터 칭저우까지 주유했다. 춘추시대 조나라와 제나라 땅이다. 주체할 수 없는 혈기를 뿌리고 다녔다. 말 타고 사냥도 즐겼다. 구마파청광(裘馬頗清狂)이라 회상한다. 미친놈처럼 마음껏 놀았다는 뜻이다. 조각상 표정에 청년 두보가 살아나고 있다.
서른셋에 뤄양으로 온 당대 시인 이백(李白)과 조우한다. 조각상 아래 최찬쌍성(璀璨雙星)이라 적혀 있다. 수많은 별 중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두 개의 별이다. 두보가 11살 연하다. 만나자마자 손길이 통해 시우(詩友)가 됐다. 두 손 꼭 맞잡은 조각상이다. 마음은 물론이고 발길도 맞아 중원 일대로 인문 여행을 다녔다. 술 마시며 시어를 주고받는 장면이 영화처럼 떠오른다. 당나라 판 브로맨스다. 안내판 설명이 재미있다. ‘만약 노자와 공자가 만났다면 이를 제외하고 그 어디에도 이런 기념비적 만남이 없다’고 한다.
두보는 서른다섯부터 10년간 수도 장안에 기거한다. 인생의 쓴맛만 본 시절이다. 이백을 비롯 당대를 주름잡던 술꾼들과 어울렸다. 8명의 문인을 등장시킨 음중팔선가(飲中八仙歌)를 남겼다. 절친 이백을 노래했다.
이백은 술 한 말에 백 편 시를 짓고 李白斗酒诗百篇
술 취하면 장안 시장에서 잠을 자며 长安市上酒家眠
천자가 불러도 배 위에 오르려 않고 天子呼来不上船
스스로 신은 술 취한 신선이라 하네 自称臣是酒中仙
두보의 음중팔선가
뤄양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장안으로 가서 다시 도전했다. 황제도 알아본 실력이었으나 재상 이임보가 전원 낙제를 시켰다. 인재 영입을 막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던 계책이었다. 국정 농단 세력이 판치던 세상이었다. 정의에 불타는 심정으로 간신배에 대한 공격과 백성에 대한 사랑을 담은 시가 쏟아진 세월이다. 안녹산 반란이 일어난다. 한직인 좌습유(左拾遺)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다.
삼우당(三友堂), 회향원(懷鄉院), 만회원(萬匯園)이 나란히 붙어 있다. 그의 일생을 그림과 모형으로 만들었다. 간언하는 모습이 보인다. 뜻은 좋았으나 황제의 노여움을 사고 쫓겨난다. 도탄에 빠진 백성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추우탄(秋雨嘆) 세 수를 쓴다. 변란의 와중에 장마가 3개월이나 지속됐다. 구호미로 연명하던 가족을 대피시킨 시점이다. 첫 수만 읽어도 절절하다.
비가 연잇고 사방의 풀조차 썩는데, 섬돌 아래 결명자만 싱싱하네
雨中百草秋爛死, 階下決明顏色鮮
가지마다 달린 잎은 깃털 덮개 같고, 수북한 꽃은 황금 엽전 같네
著葉滿枝翠羽蓋, 開花無數黃金錢
우수수 찬바람 불어 몰아치면, 아마 너 홀로 서 있기 어려울 거야
涼風蕭蕭吹汝急, 恐汝後時難獨立
서생으로 헛되이 백발만 남았으니, 미리 꽃 향기 맡아 눈물 흘리네
堂上書生空白頭, 臨風三嗅馨香泣
두보의 추우탄
감금과 피난 생활에 지친 두보는 청두에 초당을 짓고 살았다. 말년에 이르러 병세가 심해졌다. 장강이 흐르는 쿠이저우에 오두막을 짓고 2년을 머물렀다. 이때 430수에 이르는 다작을 했다. 작은 배 하나를 장만해 삼협을 통과했다. 장강을 따라 내려가며 정처 없이 머물다가 다시 이동하기를 반복했다. 일엽편주에 의지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위에양으로 가는 배 위에서 쓸쓸히 세상과 하직했다.
서쪽에 장강 지류가 흐른다. 강 건너 캉덴진에 거상의 저택이 있다. 중원의 활재신(活財神)으로 불리는 인물이 살았다. 허난을 약칭으로 예(豫)라 한다. 예상가원(豫商家園)인 강백만장원(康百萬莊園)이다. 명나라 말기에 상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집안이다. 배산임수로 건축된 저택이 어마어마하다. 건륭제 시대 12대손인 강대용이 지금 규모로 확장했다. 14대 후손 강응괴에 이르러 전국 최고의 상방으로 우뚝 섰다.
장원 분포도를 보니 어마어마한 규모다. 면적이 6만4,300㎡에 이른다. 가옥이 53채로 1,300칸이 넘는다. 동굴 집도 73채에 이른다. 주택 지역과 사당, 작업실, 여관, 채소밭과 화원 등으로 구분돼 있다. 구석구석 살펴보려면 반나절로도 부족할 듯하다. 그야말로 거대한 요새다. 쓰촨성 다이(大邑)에 위치한 유씨장원(劉氏莊園), 산둥성 치샤(栖霞)에 위치한 모씨장원(牟氏莊園)과 더불어 중국을 대표하는 3대 장원이다. 저택이 여럿 모인 거주공간을 장원이라 한다.
장원 중심에 공수상재(功垂桑梓) 비석이 있다. 공적이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마을이란 뜻이다. 청나라 말기 남방에서 태평천국 민란이 발발했다. 중원과 화북 일대에도 염군(捻軍) 세력이 봉기했다. 사염(私鹽)을 유통하던 협객 조직으로 장강 유역을 헤집고 다녔다. 계급 운동이자 반청의 깃발이었다. 스스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상인들은 단련(團練)을 조직해 대응했다. 강씨 상방도 방어에 나섰다. 전란이 끝난 후 관민이 세운 비석이다.
잔방(棧房) 구역이 있다. 외지인이 오면 묵는 여관과 은행업무를 보는 공간이다. 건물과 장식이 대단하다. 대문도 세 곳이다. 순기(順記), 괴기(魁記), 숭의덕(崇義德) 편액이 걸렸다. 돈숭신의(敦崇信義) 건물이 나온다. 신의를 돈독히 하고 중시한다는 뜻이니 상인에 어울리는 작명이다. 인출과 결산 창구도 있고 저울도 놓여 있다. 팔괘 모양으로 만든 주판이 눈길을 끈다. 둥글게 32줄이다. 어떻게 가감승제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강응괴는 두 가지 사업으로 부를 쌓았다. 포목 사업을 독점했다. 품질이 뛰어난 면화를 얻어 시장의 반을 점유했다. 유언에서 포목 사업만큼은 뺏기지 말라 했다. 조정으로부터 10년 동안 군수품을 공급할 이권도 따냈다. 도광제 시대 백련교가 9년이나 민란을 이어갔다. 군대 식량과 장비를 제때 보급해야 했다. 이를 수행할 상단으로 선정됐다. 장강 최대의 물류 상단이었다. 지휘함 한 척이 있다. 당시 선박일 리 없지만 수로가 곧 재로(財路)였음을 보여준다.
강응괴가 75세 생일잔치를 열었다. 친척과 동네 사람 모두 초청했다. 축하 인사를 받고 술잔이 세 번 돌자 갑자기 일어났다. 부채를 기록한 장부와 차용증서를 전부 불태워 버렸다. 모두 깜짝 놀랐다. 그런 다음에 기금을 출연해 구휼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중원 일대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강응괴가 태어난 해에 이어 두 번째로 금으로 도금된 양전천경(良田千頃) 편액을 걸게 됐다. 논밭 단위인 경은 약 2만 평이지만 그저 크기가 아니다. 도량이 엄청나게 넓은 상인이란 존칭이다. 백만장자라는 뜻의 백만부옹(百萬富翁)이라 했다. 이름 대신 강백만이라 불렸다.
살아있는 재신이라 불릴 만했다. 3명의 ‘활재신’을 봉공하는 사당이 있다. 중원의 강백만, 강남의 심만삼, 산둥의 완자란이 나란히 앉아있다. 은혜를 입고 본받고 싶은 상인이 전국에 엄청나게 많았다. 졸부로는 꿈도 꾸기 어렵다. 오랫동안 대를 잇고 백성의 신망이 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신이라 불리는 상인이 되려면 얼마나 대단해야 할지 상상하기 어렵다. 18대에 걸쳐 상도를 지킨 집안이다.
1900년 시안으로 도피했던 서태후와 광서제가 귀경 길에 궁이를 지났다. 강백만은 백은(白銀) 백만 냥을 투자해 행궁을 지어 가마를 맞이했다. 서태후가 앉았던 걸상인 용탑(龍榻)과 오룡병풍(五龍屏風)이 전시돼 있다. 행렬이 떠날 때 백만 냥을 추가로 기부했다. 서태후는 이런 산골에 갑부가 있는 지 몰랐다고 했다. 청나라 패망 후 일본군이 침공하자 가세가 기울었다. 18대손 강자소는 동북항일의용군에 자진해 참가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이웃 농가를 도와 구제에 나섰다. 가풍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했다. 지금은 유물로 남았지만 말이다.
화장실 입구에 흐릿하게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삼상성문(三上成文)이다. 볼일 보기 전에 새기라 했다. 북송 시대 학자 구양수의 교훈이다. 삼상은 침상(枕上), 마상(馬上), 측상(廁上)이다. 베개, 말, 측간에서도 글을 쓰거나 읽으라는 뜻이다. 딴짓 말고 언제나 학문에 힘쓰라는 메시지다. 중국 상인은 자식 교육에 꽤 신경을 썼다. 장사도 철학이 필요한 일이다. 상인 정신이 그냥 나타나지 않는다.
가훈인 유여(留餘)가 걸려 있다. 궁이 사람으로 동치제 시대에 장원 급제한 우선이 썼다. 여지를 남겨두라는 뜻이다. 무얼 남기라는 말인지 깨알같이 적었다. 세 가지다. 남겨둔 솜씨가 있어야 새로운 창조가 가능하며, 남겨둔 녹봉이 있어야 조정에 돌려줄 수 있으며, 남겨둔 재물이 있어야 자손에게 남겨줄 수 있다고 해석이 된다. 함부로 다 쓰지 말라는 경구다. 장사꾼 소리 듣지 않으려면 상인도 철학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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