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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잡을래" 물으면 분위기 깬다고?...우리에겐 더 많은 '동의'가 필요해

입력
2023.04.22 04:30
11면

<114>관계의 문을 여는 동의, 어떻게 잘 구할 수 있을까

2014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CJ E&M 제공

2014년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 CJ E&M 제공

우리말 중, 짧지만 가장 다채로운 함의가 있는 말을 하나 꼽자면 바로 ‘네’가 아닐까. 단순히 상대의 제안이나 의견에 동의를 표현하는 뜻에서부터 상대의 말을 되물을 때, 상대와의 대화를 끝내고 싶을 때 등 단순한 한 음절에 다양한 뉘앙스를 담아 다채로운 메시지를 만들 수 있다. 얼마 전 SNS에는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회사에서 사용하는 ‘넵’을 분석한 글이 떠돌면서 많은 사람에게 웃음을 줬다. 프리랜서로 사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청에도 영 무심한 표정으로 ‘네, 물결(~), 웃음(^^)’을 연달아 타이핑해 보내며 이것이 고단한 어른의 삶이구나 하고 느끼곤 한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오고 가는 ‘네’라는 응답과 이면에 깔린 복잡한 속내, 그리고 그것을 드러낼 수 없게 만드는 미묘한 어른의 사정, 그럼에도 그 이면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야말로 다정함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면을 파악하고 고려하여 소통의 문을 여는 ‘동의’

동의는 소통의 문을 여는 첫 열쇠라는 점에서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흔한 오해와는 달리 대부분의 성희롱·성폭력 문제는 아는 사이에서 발생하고 그 과정 역시 대단히 악랄하고 계획적이기보다 일상에서 오가는 다양한 신호를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않으려 할 때 주로 발생한다. 그래서 폭력예방교육 강사는 통역사가 된 심정으로 수면 아래 메시지를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도 폭력예방교육이 의무화되고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성적 관계 맺음에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보편의 상식이 됐다. 실로 젠더 미디어 ‘슬랩’에서 진행한 20대 8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스킨십이나 섹스를 하는 중에 언제든 파트너의 의사에 따라 행위를 중단하는 게 당연하다”는 의견에 여성 95%, 남성 85.4%가 동의를 표명했으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스킨십 또는 성관계 경험이 있는’ 10~40대 6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동의 없이 이뤄진 성관계가 성폭력인지’ 묻는 질문에 96.7%의 사람들이 ‘그렇다’거나 ‘매우 그렇다’고 답했다. 이 조사만 살펴보면 ‘동의’는 이제 당연한 시대정신이 된 듯 보인다. 하지만 이 매끈한 설문조사의 세상과 달리, 교실에서 동의에 대한 참여자의 태도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여러분 스킨십이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박력 있게 해요.”

“동의를 구해야겠죠? 그럼 동의는 어떻게 구하면 좋을까요?”

“우우, 찌질해요.”

이 소통이라 부르기 어려운 대화 모습은 내가 교육 현장에서 자주 겪는 현실이다.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척, 자연스러운 척해 보지만 초창기에는 이런 반응에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더군다나 저런 반응을 보이는 참여자가 여성 청소년일 때면 혼란은 더 커졌다. 흔한 편견과 달리 실로 위와 같은 반응에는 여성이 결코 적지 않았다. 특히 학교에서 발육이 조금 더 빠른 여성 청소년이 자신의 연애 경험을 근거 삼아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또래 남성 청소년들의 동공과 함께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경향은 앞서 언급한 한국성폭력상담소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성관계 중 상대방에게 여러 번 동의를 묻는 것은 분위기를 깬다’는 질문에 남성 60.3%가 ‘그렇다’, ‘매우 그렇다’고 응답했으며, ‘상대가 분명하게 거부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이다’, ‘여성의 노(NO)는 설득하면 예스(YES)로 바뀔 수 있다’는 항목에 각각 41%, 40%의 남성이 긍정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는 같은 질문의 여성들보다 두 배 가까이 높은 수치였다. 분명 이 이해의 간극이 성폭력의 원인이 될 수 있기에 손잡을 때, 키스할 때, 성관계 할 때, 동의를 구해야 한다고, 그러지 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간절하게 이야기해 보지만, 이 교육적인 이야기는 현실 속 ‘매력적인 남성상’ 앞에서 멈춘다. 동의를 구하기 위해 목구멍까지 나왔던 말을 애써 삼키며 ‘찌질이’가 되느니 차라리 ‘싸가지’가 되겠다는 남성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그래픽=김문중 기자


동의가 뭐라고…

그런데 대체 동의가 뭐라고 이렇게 고민할까? 정말 이렇게 극단의 선택지뿐일까?

2000년대 미국의 성적 동의 담론을 주도하며 ‘예스 민즈 예스 룰' 도입에 기여한 페미니스트들의 글 27편을 엮은 책 '예스 민즈 예스'. 예스 민즈 예스 룰은 거부(no)가 없다고 성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예스’라고 말했는가를 성적 동의의 기준으로 삼는 원칙이다. 재클린 프리드먼, 제시카 발렌티 엮음ㆍ송예슬 옮김. 아르테 제공

2000년대 미국의 성적 동의 담론을 주도하며 ‘예스 민즈 예스 룰' 도입에 기여한 페미니스트들의 글 27편을 엮은 책 '예스 민즈 예스'. 예스 민즈 예스 룰은 거부(no)가 없다고 성적 동의가 있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예스’라고 말했는가를 성적 동의의 기준으로 삼는 원칙이다. 재클린 프리드먼, 제시카 발렌티 엮음ㆍ송예슬 옮김. 아르테 제공

아주 가볍게 대화의 물꼬를 트거나 연필을 빌리는 것부터 같이 놀러 갈 약속을 잡고 한평생 함께 하자고 청혼을 하는 것까지 일상에서 수많은 동의를 자연스럽게 하고 있음에도 막상 동의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물으면 어려워한다. 마치 늘 자연스럽게 쉬던 숨도 어느 순간 한 번 신경 쓰기 시작하면 어색해하듯 말이다. 그러나 앞서 본 ‘넵넵’에 관한 고찰에 공감했다면 우리는 이미 동의의 첫 번째 조건을 알고 있다. 바로 평등한 관계다. 많은 이가 커피를 쏘겠다는 짠돌이 상사의 뜻밖의 제안에 신나게 따라갔다가 너무나 단호한 아메리카노 주문에 프라푸치노를 먹고 싶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따라서 아메리카노를 시켰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동의를 위해 모든 관계를 다 평등하게 만들 수는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정말 상대의 진심 어린 동의를 원한다면, 평등한 관계를 만들기 위한 사전의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도를 아냐고 묻는 게, 실로 도에 대한 탐구를 제안하기 위한 동의 묻는 과정이 아니듯 맥락이라고 이야기되는 상황과 상대에 대한 면밀한 관심은 동의를 구하는 전 과정에서 필수다. 꾸준한 관심과 평등한 관계를 위한 노력, 진정성 있는 동의를 위해 필요한 이 두 가지 조건만 두고 이야기하더라도 동의가 로맨틱한 관계에서 질겁하며 피해야 할 것이 아닌 도리어 로맨틱한 관계의 필수요소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동의를 뛰어넘는 박력 넘치는 남성?

바람직하고 매력적인 남성상은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섹시한 남성부터 앞치마만 두르고 근육을 자랑하는 섹시한 남성까지 각양각색이 있다. 그중 자주 이야기되는 매력적인 남성의 모습으로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상대의 동의를 뛰어넘어 시의적절한 필요를 채워주는 모습이 있다. 상대가 묻기도 전에 사소한 변화(“오늘 머리 스타일 바꿨네?”)를 감각적으로 알아차리고 오다 주웠다면서 무심한 듯 꼭 필요했던 것을 챙겨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박력 있고 적극적으로 스킨십을 주도하는 남성은 많은 이가 선망하고 또 질투하는 이상형 그 자체다. 그래서 남성들 사이에서는 이런 모습의 남성을 ‘잡혀 산다’며 헐뜯어 안 그래도 희소한 이들을 멸종위기에 처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여성의 욕망을 남성을 닦달하거나 의존적인 모습으로 우습게 그려내며 기대조차 못하게끔 단속했다. 하지만 실상 이 남성상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 매력의 핵심은 동의 없이 박력이라는 이름의 막무가내로 상대의 경계를 넘나드는 게 아닌, 오히려 섬세하게 상대의 욕구를 파악하고 분위기에 맞춰 동의를 구하고 이끌어 내는 과정에 탁월하다는 데 있다. 즉 이 과정에서 동의는 상대의 감정과 기분, 분위기를 파악하고 다양한 언어, 비언어적 소통으로 늘 자리해 있었지, 한 번도 생략된 적이 없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들이 그 물밑의 다양한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거나 파악하기 싫어서, 지레 설득력 있는 외모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평가절하할 뿐이다. 그러나 관계의 고수에게 동의는 숨겨야 할 것도, 생략하거나 한 번 지나고 말 어려운 관문이 아닌 관계에 긴장과 활력을 불어넣는 일종의 놀이가 될 수 있다.

“분위기 깨지게 어떻게 그 과정에서 동의를 구해요.”

여전히 교실에서 이런 이야기는 흔하다. 당장 주어진 시간은 짧고 할 이야기는 많아서 매번 동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다루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요샌 조금 덜 당황해하며 강사의 몇 없는 연애사를 쥐어짜 소박한 연기력과 함께 소개하곤 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고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가는, 이른바 ‘썸’을 탈 때 얘기다. 날은 좋고 걷는 발걸음은 산뜻하여 살짝 손등이 스치다 보면 이내 몽글몽글한 마음이 올라오곤 하는데 어떻게 이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조금 장난스레, “내가 요새 이런 문제에 예민해서 그런데, 손잡을래?”라고 물었다. 부끄러워하면 부끄러워하는 대로 그럭저럭 귀여워했고 이 이야기에 분위기 깨진다고 실망한 친구도 없었으니 제법 나쁘지 않은 방법 아니겠냐고, 재주껏 변주해 가서 써보라고 제안한다. 그럼 대부분의 학생들은 야유하며 소름 끼쳐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써먹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유치하다 여겨도 좋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더 많은 동의의 과정이 필요하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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