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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 들고 허벅지 정맥 도려낸 '김 선생'... 그의 정체는 간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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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의료 가성비가 좋다고 하죠. 아프면 예약 없이 3,000~4,000원에 전문의를 보는 나라,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나 건보 흑자, 일부 의료인의 희생 덕에 양질의 의료를 누렸던 시대도 끝나 갑니다. 지방 병원은 사라지고 목숨 살리는 과엔 지원자가 없는데, 의대 정원은 18년째 3,058명입니다. 의사 위상은 높지만 국민이 체감하는 의료 효능감은 낮아지는 모순. 문제가 뭘까요? 붕괴 직전에 이른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의사도 환자도 살 공존의 길을 찾아봅니다.
김 선생, 시작합시다.
대학병원의 유일한 심장외과 전문의 A 교수는 '김 선생'과 익숙한 눈빛을 교환했다. 교수가 환자의 가슴을 절개하자 김 선생은 허벅지를 메스로 갈랐다. 급성심근경색으로 병원에 실려온 환자다. 한시가 급하다. 꽉 막힌 관상동맥 대신 심장으로 피를 보낼 새 혈관을 빠르게 찾아, 신속하게 이어 붙여야 하는 수술. 가슴과 허벅지에서 동시 처치가 이뤄져야 한다.
수 년간 합을 맞춘 '교수'와 '선생'은 이날도 환상의 호흡을 보여줬다. 교수가 가슴뼈 안쪽에서 내흉동맥을 채취하는 사이 김 선생은 허벅지 안쪽에서 복재정맥을 채취했다. 이렇게 뽑아낸 혈관을 심장에 이어붙이는 건 교수의 몫. 김 선생은 흐물대는 혈관이 잘 드러나도록 받치면서 교수가 꿰매는 실이 엉키거나 끊어지지 않도록 주변 장기를 정리했다.
수술은 성공. 교수가 가슴을 닫자 김 선생도 허벅지의 피부를 지혈하고 꿰맸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집도의 A 교수가 인사를 남기고 떠난 뒤, 수술기록지엔 A 교수 이름만 적혔다. '퍼스트 어시스트'(보통 전공의 또는 전임의) 역할을 하며 함께 수술했던 김 선생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왜냐하면 김 선생은 의사가 아닌 간호사기 때문이다. 간호사가 메스를 들고, 환자 피부를 절개하고, 혈관을 채취하고, 다시 피부를 꿰매는 침습(侵襲)적 행위를 하는 건 명백한 불법이다. 이름을 남길 수도 없고, 남겨서도 안 된다. 김 선생은 왜 이런 불법을 저지르고 있을까? 교수는 왜 이를 방치하는 걸까?
집도의 빼고 다 해본 것 같아요. 전공의 4년차보다 잘한다, 펠로 수준이란 칭찬도 들었어요. 그럼 뭐해요? 불법이라고 버려지는 건 한순간인데.
김 선생은 바로 대학병원에서 10년 넘게 수술을 담당한 '유령 의사' 김정환(가명·39)씨다. 3년 전 수술실을 떠난 김씨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어제 일처럼 또렷한 흉부외과 수술 현장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김 선생처럼 의사의 수술이나 진료를 대신하는 인력을 진료지원인력(PA·Physician Assistant)이라고 부른다. 별도 면허가 있는 미국 등에선 유망 직종이지만, 한국에선 법적 근거가 없어 '투명인간'으로 산다.
석사를 따고 공인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PA가 되는 별도의 길이 없다. PA는 병원의 필요, 의사의 권유에 의해 신입 간호사 시절부터 따로 뽑혀 '육성'되거나, 간호사 자신들이 힘든 교대 근무에서 벗어나고자 '자원'하는 식으로 양성된다. 일반 간호사와 보수는 비슷하지만, 특별한 업무를 배우는 재미·보람·자부심을 느껴(2011년 흉부외과학회 PA 설문조사) 처음 발을 들이는 경우가 많다.
PA는 보통 간호부가 아닌 의국 소속이고, 수간호사가 아닌 전문의 지시를 따른다. 유니폼도 의사처럼 흰 가운을 입는다. 옷깃 위에 동정을 덧대 구분하는 병원도 있지만, 사정 모르는 환자 입장에선 '진짜 의사'로 보일 뿐이다.
PA는 법 밖에 존재하지만 한국 병원에서 전방위로 활약 중이다. 특히 대형병원과 대학병원엔 "없는 곳이 없을 정도"(김진현 서울대 간호학과 교수)다. 병원들이 숨기는 탓에 공식 통계는 없지만, 2021년 병원간호사회 실태조사에서 집계된 인원만 5,619명이다.
1만 명이 넘을 것이란 추산(보건의료노조)도 있다. 실제 한국일보가 수도권 대학병원 PA 인력 분포를 확인한 결과, 외과계에 집중됐던 초기와 달리, 지금은 지원 파트까지 모든 과에 PA가 배치돼 있었다. 한 수도권 대학병원 대장항문외과 교수는 "PA 없으면 수술을 못하고, 입원 환자도 못 보고, 병원이 마비된다"고 하소연했다.
있어서도 안되지만, 없어지면 더 안되는 PA. 언제부터, 왜 생겨난 걸까.
병상은 늘어나는데, 의사는 떠나고. 일손이 부족하니 간호사를 값싼 의사로 쓰는 거죠. 간호사는 응급상황에 대처 가능하고 숙련된 인력이지만, 비용은 싸니까 병원 입장에선 가성비가 딱이죠.
(수도권 종합병원 30년차 간호사 B씨)
'없앨 수 없는 불법'을 탄생시킨 건, 한국 의료 시스템의 '욕망'이다. 2010년대 들어 국내 상급종합병원들은 병상 확충에 혈안이 됐다. 병원 규모가 커지며 일손은 더 필요해졌지만, 의사들은 힘든 일을 피해 필수과를 떠났다. 누군가 그 자리를 메워야 하는 상황에서 PA는 탄생했다. ①수련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한 전공의 특별법 시행(2016년)은 '트리거'가 됐고 ②내과 외과 소아과 등 비선호과의 수련기간을 3년으로 줄인 것도 변곡점으로 꼽힌다. 의료 현장에선 "PA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려면 부족한 전공의 숫자를 대입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 실제 김정환씨가 10년 간 흉부외과 수술실을 지키는 동안, 이 병원 흉부외과 전공의는 한 명도 채워지지 않았다.
의사 업무도 야금야금 넘어왔다. 현행 의료법상 의사는 간호사에게 '의사만 할 수 있는 고유업무'를 시켜선 안 된다. 문제는 '고유업무'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게 없다 보니, 현장에서는 합법·불법의 경계가 허물어진지 오래다.
밤 사이 교수님 없이 ①혼자 회진을 돌아요. ②퇴원 진단서도 작성하고요. 입원 환자가 불편하다고 하면 ③처방도 혼자 입력하죠. 계속 투여됐던 루틴한 약이지만, 용량을 잘못 입력해 문제라도 생길까 늘 조마조마했죠.
수도권 대학병원 소화기내과에서 6년간 PA 간호사로 일했던 한수아(가명·29)씨는 병동에서 감쪽같이 '의사 행세'를 해야 했던 아찔한 기억을 떠올렸다.
회진, 처방, 진단 모두 의사의 고유 영역인데, 어떻게 가능할까. "의사들은 외래 보거나 수술하느라 병동에 거의 없어요. 매번 연락해 '구두처방'을 요청하면 엄청 귀찮아하고요. 알아서 하라는 거죠. 그러니 시스템 접속에 필요한 의사 ID랑 비밀번호 외워놓고 PA들이 돌려가며 쓸 수 밖에요." 한씨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뒤, 얘기를 이어 나갔다.
"사실 의사들도 바빠요. 교수들은 진료나 수술 없는 날엔 종일 내시경 검사실에 붙잡혀 있어요. 내시경(수면)이 비급여로 돈이 되니까 병원이 검사를 엄청나게 잡아서 굴리는 거죠."
가뜩이나 부족한 의사마저 돈 되는 일만 하다보니, PA 영역은 계속 팽창 중이다. 지방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일하던 박성수(가명·39)씨가 심장초음파실 PA로 뽑혀간 계기도 다르지 않았다. 박씨는 초음파 촬영부터, 판독, 결과지 작성까지 전 과정을 손수 했다. 모든 게 불법이었다. 박씨는 "병원은 비급여 적용이 높은 초음파 환자를 더 받으려고 PA 8명을 작정하고 꽂았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토록 중요한 일을 하지만, PA 역량 강화를 위한 별도 교육은 없다. 한 수술실 PA는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게 전부"라고 말했고, 심장초음파실 PA는 "심초음파학회 동영상을 돌려보고, 의사 전공서적을 달달 외우며 3개월 독학했다"고 회고했다. 선임 PA 밑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실전에 뛰어들었지만, 스스로를 믿지 못해 늘 두려웠다는 박성수씨는 미국 PA들이 취득하는 심장초음파 자격증(RDCS)까지 땄다. "목숨 다루는 일인데 스스로 떳떳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병원은 심장초음파실 PA들의 자격증 취득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복지부가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격증은 휴지조각이 됐다.
PA 교육 필요성은 의사들도 인정한다. 학회 차원의 시도도 있었다. PA 손을 많이 빌리는 흉부외과학회가 총대를 메고, PA 300명을 모아 공개 교육을 진행했던 게 2011년이다. 당시 흉부외과학회는 PA 자격증 제도화까지 추진했지만 "PA 양성화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 의사단체와 개원의들이 격렬하게 반발하면서 교육은 폐지됐다. 의사들은 교육 장소까지 찾아와 피켓시위를 벌였다.
그럼에도 의사들은 정작 필요할 때는 PA를 애타게 찾기 바쁘다.
내과 전문의들도 개원 앞두고, 저희한테 초음파 촬영, 판독법을 2,3주 배우고 가요. 의사들이 줄서서 대기까지 하는 걸요.
(대학병원 심장초음파실 PA로 일했던 박성수씨)
병원도, 의사도, PA 이용에 혈안이 됐지만, 정작 문제가 터지면 지켜주진 않는다. 2018년 박성수씨는 초음파실 동료 7명과 함께 의료법 위반 혐의로 고발 당했다. 병원과 교수들은 수사가 시작되자 팔짱만 꼈다. 경찰서에 불려다니며 책임을 감당해야 했던 건 온전히 PA들 몫이었다.
병원은 수사 진행 중에도 초음파 검사를 시켰단다. 억울했음에도 밥벌이를 잃을까봐 버텼지만, 교수의 '갑질'까지 참을 순 없었다. "수년간 진행한 판독 검사 결과지에 본인이 체크 안 한 게 문제 될 수 있으니, 저희 보고 대신 사인을 하라더라고요." 감옥 문턱에 선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다시 불법을 권하는 걸 보고, 그는 초음파실을 박차고 나왔다.
법원은 3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밤새 공부해 미국 자격증까지 따며 7년 쌓은 커리어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PA를 택한 것도 결국 본인 선택.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
국민들 입장에서 너무 무서울 것 같지 않나요? 수술실에서 내 배를 가르는 사람이 의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수도권 종합병원 13년차 간호사)
의사가 아닌 사람이 환자 배를 가르는 이 비정상을 어떻게 타파할까. 일단 정부는 미국처럼 PA간호사 면허를 신설해 합법화하는 대신, PA 업무 범위를 구체화해 법 테두리 안에서 투명하게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지난달 발표한 간호인력 지원 종합대책) PA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지 10년이 넘어서야 나온 대책이다.
전문가들은 제언을 보탰다. ①PA도 의사·간호사처럼 의료 행위에 대해 최대한 기록을 남기게 하고 ②위임 가능·불가능 업무가 무엇인지 선제 조사해 가이드라인을 업데이트하며 ③학회나 병원에서 내실을 갖춘 교육을 제공하고 정부가 이를 꾸준히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윤석준 고려대 예방의학과 교수)이다.
본보 인터뷰에 응한 PA 간호사들은 모두 PA 업무를 떠나 있었다. 휴직하거나 행정직으로 옮기며 현장에서 멀어졌다. 그들은 말했다. "유령으로 살다 버려지고 싶지 않아서 탈출했다"고. 의사가 떠난 자리에 PA는 유령처럼 나타났다가, 쓰여지고 이용당한 뒤, 다시 유령처럼 사라지고 있다.
<의사 캐슬 '3058'_시한부 한국 의료>
①'슬의생 99즈'는 없다
②투석 환자는 고향에 못 사나요
③의사 빈자리 채우는 PA 유령
④정원이냐 수가냐, 누구 말이 맞나
⑤벼랑 끝 한국 의료 되살리려면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3042817583729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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