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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급한' 간담회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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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최근에 한 정책 간담회에 다녀왔다. 취재 목적이 아니라 현장 의견을 전달하기 위한 당사자 자격으로 참석했다. 저출산 대책 관련, 소극적인 난임 지원 정책의 문제점을 짚어보는 자리라고 했다.
간담회에 주어진 시간은 총 35분. 주최 측의 '인사 말씀', '마무리 말씀'을 제외한 참석자들의 '의견 청취'에 할당된 시간은 단 25분. 좀 짧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자리를 마련해준 게 어디냐'며 감사히 여겼다. 조명받지 못하는 정책의 당사자들은 작은 관심 하나도 간절하고 아쉬운 법이니까. 잘 준비해서 현장의 목소리를 감히 대표해 전달하겠다는 나름의 책임감을 안고 향했다.
서둘러 도착한 간담회 장소는 비공개라는 처음 안내와 달리 너무나도 열린 공간이었다. 초청된 참석자보다 주최 측 인원이 더 많았다. 카메라도 보였다. 주최 측 SNS에 행사 사진을 업로드하기 위한 기록용 촬영이라고 했다. 거절 의사를 밝힌 뒤, 앵글 밖으로 의자를 끌고 와 고쳐 앉았다.
참석자들에게 주어진 발언 시간은 3분 남짓. 보통 남의 이야기를 먼저 묻고 듣는 입장이었던 터라, 나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게 영 어색했다. 반면 참석자 한 분은 본인의 사정을 힘겹게 전하며 울먹이기도 했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어 보이는 눈치였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여러분이 주신 의견 잘 참고하고, 반영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지원 대책을 만들어보겠습니다." 화사한 공간에 또렷하게 울려 퍼진 주최 측의 마무리 발언과 함께 간담회는 박수로 마무리됐다.
일정을 마친 뒤 추가 질문이 떠올라 담당자에게 물었더니 자료집 비슷한 책자를 펼쳤다. "아, 이미 다 만들어 놓으신 거였어요? 지금 간담회가 끝났는데 벌써요?" '의견을 잘 참고해, 반영하겠다'는 발언이 끝나기도 전에 완성돼 있던 정책. 빛의 속도로 진행된 일처리에 새삼 놀랐다. 지원 대책은 간담회 바로 다음날 오전 보도자료로도 뿌려졌다. 다행히도 간담회 이전부터 꾸준히 주장돼 왔던 현장의 요구가 많이 반영돼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공을 들였을 테다.
그럼에도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발표에 앞서 이른바 '그림'을 만들기 위해 간담회 자리를 마련한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다. 순간 지금까지 취재 현장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간담회 참석자들의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잘 참고해보겠다'는 허탈한 말 한마디라도 듣기 위해 마이크가 꺼질까 조마조마하며 다급히 할 말을 쏟아내던 그 간절함의 얼굴들이.
정부와 정치인들은 국민의 의견을 경청하겠다며 간담회를 곧잘 마련한다. 그러나 진짜 날것의 이야기를 '사전에', '충분히' 듣는 자리는 드물어 보인다. 이미 결론은 '답정너'로 정해 놓고, 구색 맞추기용 의견수렴에 나서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다. 본인들 입맛에 맞춘 참석자는 널리 알리고, 딴소리하는 참석자는 감추거나, 아예 초대받지 못하기도 한다. '국민을 들러리로 만드는 요식행위'라는 비판에도 간담회는 계속된다. 왜일까. 간담회를 반드시 열어야 하는 주인공은 따로 있기 때문은 아닐지. 정책을 원하는 사람보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의 필요가 먼저여서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이상 간담회장을 들어설 땐 달콤했지만, 나올 땐 쌉싸름했던 참석 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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