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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증오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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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미국 뉴저지주 고교생 모니카 머헬(Monica Mahal)과 사라 데커(Sarah Decker)는 학교폭력 근절 행사 연설문을 쓰던 중 ‘업스탠더(upstander)’란 단어가 사전에 없는 말이란 걸 알게 됐다. 하지만 그들은, 불의에 눈감거나 방관(bystander)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사람을 뜻하는 그 단어를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괴롭힘의 가해자 즉 ‘나쁜 놈’이 누구인지 압니다. 또 그늘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방관자’도 압니다. 그렇다면 업스탠더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업스탠더’의 업스탠더가 되기로 결심했다. 온라인 사이트(change.org)를 통해 메리엄-웹스터사와 옥스퍼드대 출판부를 상대로 신조어 등재 캠페인을 시작했다. 주 민주당 하원의원(Tom Kean Jr.)까지 만나 설득했다. 그런 노력 덕에 ‘업스탠더’는 2015년 6월 옥스퍼드 사전 온라인판을 시작으로 거의 모든 영어사전에 잇달아 실렸고, 국제적 학교폭력 예방 표어 "방관자가 아닌 나서는(맞서는) 자가 되자(Be an Upstander, Not a Bystander)"도 생겨났다. 저 표어는 한국 교육부 ‘2021 학교폭력 예방교육 컨설팅 매뉴얼’ 중등 영어교과 연계 프로그램에도 쓰였다.
알려진 바, 17세기부터 쓰이다 만 ‘업스탠더’를 발굴(?)해 세상에 알린 이는 ‘미국과 대량학살의 시대'란 책으로 2003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 겸 외교관 서맨서 파워(Samantha Power)다. 그는 20세기 초 오스만제국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세상에 폭로한 당시 미국 대사 헨리 모건소(Henry Morgenthau Sr, 1856~1946)와 1940년대 초까지 대량학살이란 서술적 표현으로 통용되던 범죄에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죄명을 부여한 폴란드 법률가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1959) 등을 대표적인 업스탠더라 소개했다.
하지만 머헬 등이 저 단어를 알게 된 건 청소년 역사-시민의식 교육 NGO ‘역사와 자신 직시하기(Facing History and Ourselves, 이하 FHO)’를 통해서였다. FHO는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여러 제노사이드와 인종-민족- 성차별 등 편견과 혐오의 진실을 가르치고, 역사적 상상력과 토론 등을 통해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교육해온 단체. FHO 뉴욕지부에서 인턴으로도 일한 데커는 2014년 한 인터뷰에서 “업스탠더의 개념은 우리에게 학교 카페테리아나 복도, 라커룸에서 빚어지는 일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우리는 그런 변화가 온 세상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1976년 미국의 한 공립 중학교 교사 마고 스턴 스트롬(Margot Stern Strom, 1941.11.10~2023.3.28)이 교실 한 칸에서 FHO 교육을 시작하며 품었던 희망이 데커의 바람과 같았다. 미국 전역을 비롯한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수백 만 명의 ‘머헬과 데커’들에게 역사와 현실을 일깨우고 업스탠더로서의 자신감과 희망을 북돋워온 FHO의 설립자 겸 교육자 마고 스턴 스트롬이 지난 달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1975년 봄 매사추세츠주 브루크라인(Brookline)의 한 중등학교(Runkle School) 사회과 교사 스트롬은, 시교육감과 사회과 부장의 권유로 참가한 홀로코스트 워크숍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학서 역사를 전공한 10년차 유대인 교사인 자신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너무 아는 게 없더라는 것. 아이들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너무 끔찍하고 복잡한 역사라는 이유 때문에 못 배우고 덜 배운, '안네의 일기'가 담지 못한 더 중요한 진실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 함께 참가한 동료 교사 빌 파슨스(Bill Parsons)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훗날 스트롬은 “가장 나쁜 역사는 망각의 역사다. (...) 우리는 학생으로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침묵의 희생자였고, 교사로서 그 침묵을 영속화하고 있었다”고 자전 에세이에 썼다.
두 교사는 함께 수업 안과 자료를 만들어 이듬해 중2 학생들을 대상으로 ‘홀로코스트와 인간 행동’이란 커리큘럼을 개설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왜 살해했는지의 지식에서 나아가 특정 상황에 학생 개개인을 서보게 하는 수업, 이를테면 1930, 40년대 어느 사건 현장에 각자가 나치 병사로, 또는 평범한 독일 시민으로서, 또는 수용소 수감자로 서서 스스로 생각하고 토론하고 판단하게 하는 교육이었다. 역사를 대상화하지 않고 현실과 개인의 삶을 거기 겹쳐보게 하는, 그럼으로써 편견과 증오를 넘어선 공동체 구성원을 양성하는 교육. 그렇게 FHO가 시작됐다.
스트롬의 70년대는 진보의 시대였고, 그가 살던 곳은 자유주의자들이 우세한 미국 북동부였다. 한 학교 교실에서 시작된 FHO 프로그램은 시 교육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며 이내 교육구와 주 전역으로 확대됐고, 77년엔 연방지원금으로 교사 400명을 대상으로 한 3개년 연수프로그램까지 가동하게 됐다. 지미 카터가 대통령 직속 ‘홀로코스트위원회’를 설립하기 1년 전이었다.
FHO 집행위원회 이사를 지낸 하버드대 로스쿨 전 학장 마사 미노우(Martha Minow)의 말처럼, “모든 증오와 편견은 아이들의 놀이터에서부터 내전에 이르기까지 대동소이한 패턴을 공유”한다. 홀로코스트와 반유대주의로 시작된 FHO 교육 프로그램과 자료는 내로라하는 교육학자와 전공 교수, 교사 등의 도움으로 점차 방대하고 정밀해졌고, 주제 역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보스니아 내전 등의 인종-민족 학살과 이민자-노숙자 문제, 인권과 시민권, 문화와 정체성, 민주주의와 참여, 형평과 포용 등으로 확장돼왔다.
마고 스턴 스토롬은 미국 북동부 시카고의 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만 5세 때부터 중남부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성장했다. 가구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는 유대인 차별을 경험한 이들이었다. 아버지는 신문 스크랩을, 어머니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들을 3남매에게 읽히며 함께 토론하곤 했다고 한다.
당시 멤피스 지역 정서는 집안 분위기와 사뭇 달랐다. 멤피스 동물원은 주중 단 하루 목요일에만 흑인 입장을 허용했고 학교 수도꼭지에도 ‘white(백인용)’와 ‘colored(유색인용)’란 표찰이 달려 있었다. 스트롬은 “만일 당신이 아이라면 당연히 ‘colored’를 선택하지 않겠는가. 그건 무지개같은 걸 연상시켜 흰색보다 훨씬 흥미로우니까.(…) 하지만 당신은 사회의 룰을 따라야 한다”고, 86년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러면서도 수업땐 미국의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을 가르쳤다. 심지어 테네시주 역사 시간에는 남북전쟁에서 남부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만 가르쳤을 뿐 북부 연방군이 최종 승자라는 사실조차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자전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도그마 안에 머무는 것은 훨씬 안전하고 아늑했다. 나와 급우들은 (도그마의) 침묵에 의해 배반당한 셈이었다. 우리는 편견-차별의 유산, 그리고 복원력과 용기의 실제 역사를 배우고 수용할 수 있는 믿음직한 존재로 대우받지 못했다.”
청소년들에게 집단학살 같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가르치는 것이 위험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진짜 위험은 그런 문제를 감추거나 늦출 때 비롯된다. 아이들은 모호함을 감당할 수 있다. 그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배우면 상상할 수 있다. 진실을 알고 관점을 확장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말했다.
청소년은 편견-차별의 유산, 복원력과 용기의 실제 역사를 수용할 수 있는 존재로 신뢰받아야 한다.
마고 스턴 스트롬 에세이에서
스트롬과 FHO도 물론, 동료교사나 학부모, 선출직 공직자들로부터 다양한 반발을 샀다. 끔찍한 것들을 가르쳐 미성숙한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학대한다거나 편향된 역사관을 일방적으로 주입한다는 비판…. 80년대 미국 극우보수의 상징적 존재 필리스 슐래플리(Phyllis Schlafly)와 그가 설립한 보수 교육법률단체 ‘이글포럼(Eagle Forum)’이 선봉이었다.
1986~88년 레이건 정부의 교육부는 FHO에 대한 예산 지원을 중단했다. 교육부 자체 평가에서도 우수한 성과를 인정받은 FHO가 내외부인사 합동 심사에서 2년 연속 부적절 판정을 받으면서 편파성 논란이 빚어지자 교육부는 88년 역사교육 관련 단체의 지원 자격까지 박탈했다. 88년 10월 하원 청문회가 열렸다. 레이건 행정부 교육컨설턴트였던 보수 역사학자 크리스티나 프라이스(Christina Price, 당시엔 Jeffrey)가 심사 과정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나치의 입장과 (인종차별에 대한) KKK의 입장이, FHO 교육프로그램에 공평하게 반영되지 않아 균형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의견을 낸 사실이 확인됐다. 프라이스는 “(FHO의 수업은) 히틀러와 괴벨스가 독일 국민을 선동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생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역사가 아닌 선동”이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유혈 개입이나 캄보디아 크메르루즈의 잔학 행위에 대한 교훈을 포함하지 않아 객관성도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심사위원 중 한 명인 교육부 고위 공무원(Shirley Curry)은 FHO 프로그램이 중2~3학년에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제기했다. 스트롬은 “커리큘럼에 포함된 나치 영화와 다큐멘터리 자료만으로도 나치의 관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며 “도대체 나치의 관점이란 게 뭐냐, 사람을 학살해도 된다는 것 말이냐?(…) FHO는 그게 옳다고 가르치진 않는다”고 반박했다. 이듬해 1월 민주당 뉴욕 맨해튼 하원의원 테드 바이스(Ted Weiss)가 의원 65명을 서명을 받아 심사재고 청원서를 전달했지만 교육부는 요지부동이었다.
1995년 뉴트 깅리치 당시 공화당 하원의장이 하원 공식 역사를 관리하는 전임 사료관으로 프라이스를 임명, 프라이스의 80년대 교육부 심사 당시의 발언이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뉴욕주 민주당 의원 찰스 슈머(Charles E. Schumer)는 “그런 게 우파의 신종 다문화주의냐"라고 비판했다. 프라이스는 “KKK 단원을 중학교 교실에 불러 입장을 들어봐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고 해명하며 자신을 반유대주의자나 인종주의자로 비판하는 것은 중상모략이라고 항변했지만 깅리치는 일주일만에 그를 경질했다.
매사추세츠 보스턴에 본부를 둔 FHO는 미국 50개 주 주요 도시를 비롯 캐나다와 영국에 지역사무소를 두고,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 북아일랜드 등에 지부를 개설해 운영 중이다. 각 사무소는 지역별 교육 이슈를 발굴하고 프로그램과 교재, 지침서 등을 만들어, 누구나 쉽게 무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하고, 필요한 경우 교사 연수 서비스 등도 해준다. 지금까지 전세계 100여개 국 교사 1,500여 명이 연수 등을 통해 FHO와 인연을 맺었고, 최소 수백만 명의 청소년이 FHO 교육을 받았고, 교사 약 91%와 학생 94%가 교육적 가치를 옹호했다. 스트롬은 2004년 은퇴할 때까지 만 38년간 FHO를 이끌었고, 공동 설립자인 파슨스는 88년까지 프로그램 디렉터로 활동한 뒤 워싱턴DC 홀로코스트기념관 관장(1988~2015)을 지내고 2016년 작고했다.
스트롬의 오랜 동료인 마사 미노우는 “스트롬의 추진력과 공감력,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을 편견과 증오의 강력하고도 복잡한 힘에 맞설 수 있도록 인도하는 능력에 영감을 얻은 수많은 이들 중 한 사람이 바로 나"라며 " 그와 함께 일하며 친구가 된 덕에 내 삶과 경력의 궤도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스트롬은 일리노이 어배나-샴페인대(1964, 역사)와 하버드대 대학원(77, 교육학)을 나왔고, 대학 동창인 장기이식 면역학자 테리 스트롬(Terry Strom, 2018년 작고)과 64년 결혼해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애덤(Adam)은 비영리 이민자 청소년 교육 인권 단체인 ‘Re-Imaging Migration’을 설립해 운영 중이고, 딸(Rachel Fan Stern Strom)은 뉴욕 브루클린에서 수정헌법 1조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스트롬은 은퇴 직후인 2015년 하버드 교육대학원 저널 인터뷰에서 FHO를 살아있는 도서관에 비유하며 "이후로도 계속 발전하며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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