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국가 폭력도 반성 못하면서

입력
2023.04.10 22:00
27면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태영호 국민의힘 최고위원이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탈한 국가 권력은 어떻게 광기와 야만으로 치닫는가. 제주 4·3은 그 끔찍한 참상의 시간을 한국 현대사에 새겨 놓았다. 4·3은 남로당의 무장봉기로 촉발된 사건이지만, 그 후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들이 무수히 희생됐다. 제주도민의 10%가 짧은 시기에 집단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여야 의원들이 공동 발의한 '4·3 특별법'이 2000년 1월 국회를 통과했으며, 2014년 박근혜 정부가 4·3을 국가 기념일로 정했다. 국가 권력의 과오에 대해 우리 사회는 진영에 관계없이 합의를 했다. 비로소 4·3이 공식적으로 신원됐다. 그러므로 이제는 반성의 시간이다.

제주 4·3 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인간의 도덕성이 얼마나 처참하게 망가질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인간은 편향에 쉽게 빠지고 선동에 취약해 자주 실패한다. 인간의 뇌가 '사고의 지름길'로 가기 좋아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집단의 야만과 광기는 지난 시절 불행한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 주위 어딘가에 엎드려 있다. 혐오와 선동의 언어가 흘러넘치는 광장과 인터넷 공간을 보라. 상대를 악마화해 절멸시키고 말겠다는 적의가 가득하다. 어디선가 우연하게 불행한 불씨 하나가 툭 떨어져, 저 지나간 시절의 광기를 불러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4·3 사건의 국가 폭력을 상기하고 반성하는 것은 사회에 도덕적, 정치적 레드라인을 긋는 행위다. 더 이상 넘어서는 안 되는 선 말이다.

하지만 75주년을 맞은 이번 제주 4·3 추념식은 여러 가지로 문제적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여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불참한 건 두 번째 문제다. 국무총리가 대독한 대통령 추념사엔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기린다"는 의례적 얘기만 있고, 국가 폭력에 대한 반성의 언어는 어디에도 없었다. "(제주를) 자연과 첨단 기술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의 보석 같은 곳으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얘기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여당 최고위원인 태영호 의원은 4·3 사건을 "김일성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고 발언해 물의를 일으켰다. "많은 도민이 억울하게 희생됐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이는 사족이다. '김일성에 의한'이라는 사실도 틀렸지만, 더 큰 문제는 4·3이라는 국가 폭력 사건을 다시 이념의 선전장으로 데려간 것이다. 끔찍한 비극을 겪고도 긴 세월 '빨갱이' 낙인에 한 맺힌 유족들에게 비수를 다시 꽂은 셈이다.

우리는 과거사에 대해 왜 거듭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는가. 사과의 지속이야말로 진정성을 보여주는 유일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잘못할 수 있지만, 반성하지 않는 자와는 미래를 함께할 수 없다. 최근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는 "(과거사에 대한) 역대 내각의 입장 계승"이라는 지극히 무성의한 발언을 했다. "유감의 뜻(나카소네)"부터 "통절한 사과(오부치)"까지 내각별 사과의 온도차는 무척 크다. 또 아베 전 총리는 사과와 이를 부정하는 듯한 망언을 번갈아 했다. 그러니 일본이 어느 입장을 이어받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본이 진심 어린 사과를 거듭해야 하는 이유는, 그게 가해자 스스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자기 치유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가 폭력을 반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불행한 과거를 직시하는 것도 용기다. 야만과 광기를 동반한 폭력은 어느 개인, 어느 집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경계하고 다짐하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터져 나올 수 있는 잠재된 사건이다. 끊임없는 반성만이 그 불길한 힘들의 준동을 막을 수 있다.


이주엽 작사가·JNH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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