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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지나간 자리

입력
2023.04.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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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장갑. 노조 제공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장갑. 노조 제공

지금으로부터 2년도 더 된 일이다. 새카만 분진을 뒤집어쓴 비정규직 노동자를 담은 사진 한 장이 한국 사회를 뒤흔든 것은. 부실한 성능 탓에 마스크를 쓰고도 철 가루며 먼지가 뚫고 들어와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은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한 차별의 민낯 자체였다. 여론이 들끓자 원청인 현대자동차는 부랴부랴 사내 하청에도 1급 방진 마스크를 다시 지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문제가 해결됐다"는 안도감을 안고 이내 이들을 잊어버렸다.

새카맣게 잊었던 분진이 앉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얼굴을 2023년 다시 조우했다.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등의 주최로 열린 '간접고용 노동 중간착취 제도 개선 토론회'에서 현장 발언자로 나선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 하청 노동자였다. 타이어 등에 들어가는 카본 미세분말을 만드는 이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원청 노동자들은 제한 없이 쓰는 일회용 방진 마스크와 방진복, 장갑의 수량이 정해져 있다고 했다. 일회용품인데도 빨아서 다시 쓰고, 원청 노동자들이 사용하고 공장에 버린 것들을 주워 쓰는 처지다.

국회 토론회에 나선 비정규직 노동자 김성호씨는 "원청 노동자들이 사용하고 버린 장갑을 빨아서 쓴다"며 "이를 전문용어로 '득템'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득템. 한마디로 '좋은 아이템'을 얻는다는 의미다. 김씨의 동료들이 토론회에 들고 온, 반나절도 입지 않았는데도 더러워진 일회용 방진복은 아무리 봐도 좋은 아이템이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물건이었다. 공장이 있는 전남 여수에서 서울 여의도까지 오염된 방진복을 가지고 300㎞가 넘는 거리를 달려온 절박한 마음과 득템이라는 단어의 부조화 덕에 그의 말이 툭 튀어나온 못처럼 내내 걸렸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씨를 비롯한 비를라카본코리아 사내 하청 노동자는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40일 가까이 총파업을 하고 있다. 지난달과 이번 달에는 분진이 묻은 방진복을 입은 채로 여수시청과 고용노동부 여수지청 앞에서 108배를 하기도 했다. 김씨와 동료들이 토론회에서 말한 '득템'에 대해 쓴 기사에는 "하청을 막아야 한다"는 댓글이 달렸다. 많은 이들이 부당한 현실을 고쳐야 한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그렇지만 분노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하지만 공분이 지나간 자리, 남은 사람들이 있다. 간접고용 노동자의 현실을 다룬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보도하며 현대차 비정규직의 방진 마스크 관련 사진을 기사에 실으려 당사자에게 연락을 한 적이 있다. 이미 기사로 많이 나갔는데도 그는 "가족들이 너무 마음 아파하더라"며 얼굴에 모자이크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더 이상 사회에는 충격을 주지 않는 '새롭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그의 가족에게는 마주할 때마다 상처였다.

모두에게 잊혔더라도 누군가에게 또 그의 가족들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부당한 현실인 셈이다. 이를 바로잡으려 민주당은 '중간착취 방지법'의 상반기 입법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 중간착취 제도 개선 토론회에 나선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이제 이런 얘기를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벌써 수차례 국회에서, 또 언론 앞에서 비정규직의 현실을 고발했지만 바뀌는 게 없었다는 한탄이었다. 그들의 말이 맞다. 이제 이런 얘기는 정말 그만해야 할 때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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