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삼국유사'는 함께 읽어 즐겁고 유익한 우리 민족의 고전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이 원형처럼 담겼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대고 다가가, 1,500여 년 전 조상들의 삶과 우리들의 세계를 함께 살펴본다.
우리 설화의 첫 渡日 부부, 연오랑 세오녀
백성이 해와 달의 '정령'이라는 상징
일제 국권침탈도 도장 쥔 이들의 무능 탓
우리 설화에서 일본이 등장하는 첫 사례는 아마도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일 것이다. 연오와 세오는 포항의 바닷가에서 살던 부부였다.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차례로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 각각 왕과 왕비가 되었다. '삼국유사'는 그것을 신라 아달라왕 4년 곧 서기 157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적었다.
이 일은 일본의 많은 연구자에게도 비상한 관심 사안이다. 우리와 일본은 일찍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교류하였고, 그 때문에 설화로 정착된 이야기 또한 다양하게 나온다. 일연은 여기서 '진짜 왕은 아니다'라는 주석을 달아, 조심스럽게 사실의 영역에서 발을 뺀다.
응당 사실을 떠나 이야기 자체로 이해해 보는 것이 낫다. 어부였던 연오가 바닷가에서 웬 바위를 발견하고, 그 위에 올라탔더니 바위가 바다를 건넜다. 연오가 돌아오지 않자 다음 날 세오가 바닷가로 나가 찾는다. 예의 바위 위에 연오의 신발이 놓여 있고, 세오가 따라 올라타자 역시 바위가 바다를 건넜다. 바위와 신발이 핵심이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연오와 세오 부부가 사라지자 신라 땅의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천지가 깜깜해졌다. 왕이 일관(日官)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일월지정(日月之精)이었던 백성 둘이 사라진 때문이라고 말한다. 연오와 세오는 다름 아닌 해와 달의 정령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어느 말보다 이에 주목하자. 연오와 세오가 본디 해와 달의 정령인데 몰랐다는 말일까, 백성이란 모름지기 해와 달의 정령 같은 존재라는 말일까.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왕조시대부터 엄연하였으니 후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전통을 서기 157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우리를 얼마나 느껍게 하는가.
백성 없이 나라는 그 순간 깜깜해지는 것이다. 해와 달의 정령을 찾아 허둥지둥 일본까지 쫓아간 신라 사신에게 연오는 세오가 짠 비단을 준다. 하늘의 명령으로 왔으니 돌아갈 수 없는 몸, 대신 이 비단을 가져다 하늘에 제사 지내라고 하였다. 깜깜한 천지를 다시 밝게 해 주는 것도 백성이다. 여기서는 비단이 핵심이다.
바위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굳센 장면은 상상조차 즐겁다. 신발을 남겨 행선지를 밝히는 의리라니, 게다가 딱한 처지의 사신에게 건네는 비단까지, 고운 마음 씀씀이 가득한 이가 연오와 세오였다. 두 사람은 바로 우리네 백성을 특정한다. 실은 연오와 세오로 특정된 필부(匹夫) 필부(匹婦)가 모두 해와 달의 정령이다. 정령은 곧 그들의 기개가 강하다는 뜻이다. 백성은 언제나 그랬다.
임진왜란 때로 눈을 돌려 보자.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원균의 칠천량해전에 나간 병사가 다르지 않았다. 명량에서 12척은 칠천량에서 겨우 빠져나온 배였다. 흔히 평하기를, 원균은 강한데도 졌고 이순신은 약한데도 이겼다고 한다. 정말인가? 이는 원균과 이순신의 입장에서만 보니 그렇다. 백성은 그저 한결같았다. 원균은 강한 백성을 약하게 만들었고, 이순신은 강한 백성을 알아봤을 뿐이다.
대한제국 말기, 나라가 약해 국권을 잃었다고 한다. 아니다, 나라의 도장을 쥔 이가 약했다고 해야 옳다. 미국 공사관의 무관 조지 포크가 1884년 11월 삼남지방을 여행하며 남긴 한 대목에, 포크가 커피를 끓여 하급 관리에게 한잔 주면 그는 '매번 절반을 마시고 나머지는 십여 명 이상의 방 바깥에서 어슬렁거리는 이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이 나온다. 포크는 그것을 무척 인상 깊게 봤다. 그에 비해 '말썽을 일으키기 쉽고,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게을러 보인 쪽'은 고급 관리였다. 불행히도 그들이 도장을 쥔 자였다.
백성이 해와 달의 정령인 것은 서기 157년부터 그랬다. 백성을 잃어버린 자만이 허둥댔다. 그처럼 허둥대는 2023년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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