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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반전의 종결자

입력
2023.04.09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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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월 시인이 지은 노랫말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로 시작하는 가곡 '4월의 노래'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4월은 목련의 계절이다. 보통 3월 말에 피기 시작하여 4월에 만개하는 목련은 개나리, 진달래, 벚꽃같이 비슷한 시기에 피는 다른 봄꽃들에 비해 꽃의 크기, 모양, 화사함이 크게 두드러지기 때문이리라. 특히 목련(정확히는 백목련)의 꽃 빛깔은 순백이라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기품과 신비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밤에 목련을 보면 그러한 느낌이 더 하다.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는 목련꽃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왠지 귀기(鬼氣)가 어려 있어 한밤중에 보면 마음이 섬뜩해진다고까지 했고, 최봄샘 시인은 '목련꽃'이라는 시에서 목련꽃 봉오리를 '꽃등불'에 비유했는데 밤에 보면 정말이지 실감 나는 표현이다.

꽃필 때의 눈부신 아름다움에 비해, 질 때의 목련은 영 딴판이다. 급반전이 일어난다. 피었는가 싶었는데 며칠 지나지도 않아, 보는 이의 눈 망막에 담긴 그 이미지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꽃잎이 모가지가 잘리듯 뚝뚝 떨어진다. 뭐가 그리 급한지 순식간에 져버리는 건 차치하고라도, 떨어진 하얀 꽃잎이 마치 정을 떼듯이 흙빛으로 변해가다가 마침내 시커멓게 말라버리는 모습은, 과장해서 말하면 배신감마저 들게 한다. 꽃필 때의 경탄은 간데없고 탄식만이 남는 것 같다. 자연의 이치가 그러한데 왜 그러느냐고 묻는 건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임을 알면서도 봄에 목련이 피고 지는 걸 볼 때마다 왜 이다지도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다지도 급하고 추하게 져버리는가 하는 의문 아닌 의문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런데 언젠가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어느 변호사의 칼럼을 읽고 의문의 실마리가 풀렸다. 그 변호사는 '대한변호사협회장을 하면서 권력자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대부분 자신은 목련처럼 화려하면서 목백일홍처럼 오래갈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듯 보였다'고 쓰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화려할수록 그것을 누리는 기간은 짧다.' 그 글을 본 순간 '그렇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일수록 오래 지속되는 건 드물지' 하는 단순한 깨달음이 왔다. 이어 떨어진 흙빛 꽃잎도 추하게만 생각되지 않았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그리고 얼굴이 흙빛이라는 말이 사색(死色)인 안색을 뜻하는 것처럼 흙빛 목련 꽃잎은 죽음을 선명하게 상징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곳곳에 목련이 피고 지고 있다. 나뭇가지에 눈부신 순백의 꽃잎이 앞다퉈 피는 와중에도 주위 땅바닥에는 흙빛으로 화한 꽃잎들이 쌓여간다.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형국이다. '삶과 죽음', '생사(生死)'처럼 보통은 '삶'이 '죽음'보다 먼저 나오지만 때때로 사생관(死生觀), 사생결단(死生決斷)같이 '죽음'이 우선하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이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한 것처럼, 죽음에 대한 태도가 결정되어야 비로소 삶에 대한 자세를 바로 결단할 수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목련은 필 때 보여준 순백의 아름다움과 생명력보다 지고 난 뒤의 흙빛 꽃잎으로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봄기운이 완연하다. 바닥에 쌓인 흙빛 목련 꽃잎에 시선을 두다가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왠지 가깝게 느껴지다 순간 아득하다. 봄날 아지랑이 때문인가 보다.


우재욱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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