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알쏭달쏭하고 하찮은, 그것이 바로 인생

입력
2023.04.07 10:00
15면

OOO(정세원) '인생의 요정'

편집자주

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

'인생의 요정'에서 요정은 인간을 돕는 존재가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하다가 가끔 하는 참견 한마디에 작가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인생의 요정'에서 요정은 인간을 돕는 존재가 아니다.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하다가 가끔 하는 참견 한마디에 작가의 인생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얼마 전 얼룩말 세로가 동물원에서 탈출했었다. 세로가 ‘삐졌다’느니 ‘반항기’라며 귀여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착잡했다. 인간이 동물의 행동을 입맛에 맞게 의인화해 즐기는 게 위험해 보여서다. 우리가 과연 다른 종에 대해 다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다른 종에게 인간은 어떻게 보일까?

일본 작가 다와다 요코의 소설 '눈 속의 에튀드' 화자는 북극곰이다. 곰이 볼 때 인간은 “손가락은 섬세하게 만들어졌고 손톱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문장을 읽은 뒤부터 손톱을 깎을 때마다 웃음이 나온다.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하찮은 것들. “호모 사피엔스는 눈을 너무 자주 껌뻑거린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눈을 크게 뜨고 봐도 모자랄 텐데 말이다. (…) 도대체 싸움에 적합하지가 않은 종이다. 그런데도 싸움과 전쟁을 좋아한다. 누가 이 멍청한 동물들을 창조했는가?” 통쾌하다. 지구상에서 인간만 유일하게 지능이 있다는 양 오만한 인간을 냉정하게 뜯어보는 이런 시선, 속이 다 시원해진다.

'인생의 요정'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신랄하면서도 산뜻하게 그려낸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인생의 요정'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신랄하면서도 산뜻하게 그려낸다. 위즈덤하우스 제공

작가 OOO의 새 만화 '인생의 요정'이 그 궤를 같이한다. 곰에게 인간의 손톱이 하찮듯 요정에게 인간은 존재 그 자체가 하찮다. 본래 청소의 요정이었으나 게으름을 피우다 강등되어 인간을 맡게 된 인생의 요정. 화장실 청소보다 인간이 더 싫다고 절규했지만 결국 인간계에 내려와 인간을 상대하게 된다. 사실 하는 일은 별로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구경만 하다가 가끔 있으나 마나 한 참견을 하는 정도다. 인생의 요정을 비롯해 어둠의 요정, 복수의 요정, 낚시의 요정, 날씨의 요정, 업무의 요정 등이 귀여운 외모에 그렇지 않은 태도로 인간들에게 알쏭달쏭하고 미미한 영향을 끼치는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쳐진다.

요리의 요정은 구면이다. 작가의 전작 '어떤 만화', '무슨 만화'에 등장해 많은 사랑을 받은 바 있다. 참고로 그는 요리를 도와주는 요정이 아니라 음식 재료의 복수를 하는 요정. (요정은 인간을 돕지 않는다.) 이번에는 괴상망측한 음식을 만드느라 식자재를 낭비하는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방송을 시작한다. 좋은 취지로 시작했던 방송이 점점 조회수와 인기를 위해 자극을 좇다가 난장판이 되는 과정은 현실을 똑같이 비추고 있어서 웃기면서도 입맛이 씁쓸하다.

인생의 요정·정세원(OOO) 지음·위즈덤하우스 발행·272쪽·1만6,800원

인생의 요정·정세원(OOO) 지음·위즈덤하우스 발행·272쪽·1만6,800원

단행본에는 요정 옴니버스 외에 두 개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멘트 빠칭코'는 돈을 내야만 칭찬을 해주는 수상한 '빠칭코'와 인정 욕구에 허덕이는 인간들을, '지구 멸망의 날'은 환경오염으로 멸망을 앞둔 지구를 지킨답시고 각 분야의 달인들이 모여 한바탕 떠들어대는 헛소리들을 담고 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인간의 어리석음을 어쩜 이렇게 신랄하면서도 산뜻하게 그려내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가가 혹시 ‘풍자의 요정’ 도움을 받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도 해봤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말했지만 요정은 인간을 돕지 않는다. 인간이 저지른 잘못이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니 섭섭해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하루하루 착하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친절한 요정을 만날 날도 오지 않을까? 일단 식재료부터 아끼고 사랑하자.

미깡 (만화가)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