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 좋아서 불행하다"는 중국 청년들이 쓰는 '쿵이지 문학'이란?

입력
2023.04.02 18:5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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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스펙에도 취업 못하는 중국 청년들
장삼 벗지 못하는 루쉰 소설 '쿵이지'에 비유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단편 소설 '쿵이지'의 주인공 쿵이지는 밥벌이도 못 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체면치레만 중시하는 허세 가득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진은 소설 쿵이지 속 삽화. 바이두 캡처

중국의 대문호 루쉰의 단편 소설 '쿵이지'의 주인공 쿵이지는 밥벌이도 못 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체면치레만 중시하는 허세 가득한 인물로 그려진다. 사진은 소설 쿵이지 속 삽화. 바이두 캡처

중국에서 '쿵이지(孔乙己) 문학' 논쟁이 한창이다.

쿵이지는 체면치레만 중시하며 도태되어 가는 청나라 말기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 루쉰의 단편 소설 제목이자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다. 대학 혹은 대학원까지 졸업하고도 취업하지 못하는 요즘 중국 청년들이 스스로를 쿵이지에 빗대며 신세 한탄을 하는데, 이들이 온라인에 쓴 글이 '쿵이지 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로 불린다.

쿵이지 문학을 놓고 세대 갈등도 벌어진다. 기성세대는 "불만만 품지 말고, 대학을 나왔건 대학원을 나왔건 일단 일을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고 다그친다. 청년들은 "사회가 제대로 된 일자리를 만들지 못한 책임"이라고 항변한다.

청년들 "내가 장삼 벗지 못한 쿵이지였구나"

2021년 6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 있는 화중사범대학에서 학부생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우한=AFP 연합뉴스

2021년 6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 있는 화중사범대학에서 학부생 졸업식이 열리고 있다. 우한=AFP 연합뉴스

쿵이지 문학의 단골 레퍼토리는 "괜히 공부를 해서 불행해졌다"는 한탄이다. 기회비용을 날렸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직업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난 책을 읽고야 말았네", "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가 되어 행복할 수 있었을까", "배움은 성공의 디딤돌이라던데, 배울수록 배운 곳에서 내려올 수 없었고 그 옛날 장삼(長衫·승려의 웃옷)을 벗지 못한 쿵이지가 지금의 나였구나..." 등 짧은 글에 사회에 대한 불만을 담는다.

소설 속 쿵이지는 높은 계급의 상징인 장삼을 걸쳐 입고 허름한 선술집에서 선 채로 술을 마신다. 서서 술을 마신다는 건 돈이 없다는 뜻이고, 그런 주제에 장삼씩이나 걸쳤다는 것은 지식인으로의 체면만은 포기하기 어려운 쿵이지의 내면을 보여준다. 학위를 따고도 '번듯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청년들의 답답함이 쿵이지 문학에 투영된 것이다. '쿵이지 문학'은 중국 청년들의 열띤 관심에 힘입어 지난달 바이두 등 중국 주요 포털 사이트에서 인기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중국의 고학력 청년들은 실제 최악의 취업난을 겪고 있다. 베이징시 교육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전역에선 전년 대비 3.7% 증가한 474만여 명이 대학원 입학시험을 봤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지 못한 졸업생들이 대학원을 도피처로 삼은 탓이다. 중국 최고 명문대로 꼽히는 칭화대는 지난해 10월 기준 학사, 석사, 박사 8,000여 명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62%만이 취업했고 그중에서도 정규직 취업자는 52%에 그쳤다. 학력 인플레와 저성장이 겹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기성세대 "허세 벗어나 일단 일해라"

중국중앙(CC)TV와 공산주의청년단이 지난달 웨이보를 통해 쿵이지 문학을 비판하는 논평(왼쪽)을 게재했다. 이에 많은 네티즌이 댓글(오른쪽)을 통해 논평에 대한 반박에 나섰다. 자유아시아방송 화면 캡처

중국중앙(CC)TV와 공산주의청년단이 지난달 웨이보를 통해 쿵이지 문학을 비판하는 논평(왼쪽)을 게재했다. 이에 많은 네티즌이 댓글(오른쪽)을 통해 논평에 대한 반박에 나섰다. 자유아시아방송 화면 캡처


중국 정부는 쿵이지 문학에 반영된 청년들의 애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청년들의 눈높이가 문제라고 나무란다. 관영 중국중앙(CC)TV와 공산주의청년단은 지난달 "쿵이지의 장삼에 갇히지 말라"는 제목의 공동 논평을 내고 "쿵이지가 곤경에 빠진 이유는 학식 때문이 아니라 지식인의 체면을 내려놓지 못하고 노동으로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훈계했다. 중국 최대 자동차 유리 업체 푸야오그룹의 차오더왕 회장도 홍콩 봉황TV와의 인터뷰에서 쿵이지 문학을 비판하며 "중국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공무원 시험에만 열중한 나머지 제조업 진출을 꺼리고 있다"고 다그쳤다. "고학력자라는 허세에서 벗어나 제조업이든 자영업이든 일단 일을 하라"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설교에 청년들은 고개를 내젓는다. 미국 자유아시아방송(RFA)에 따르면, '글로리'라는 닉네임을 쓰는 웨이보 사용자는 "나사를 돌려서(블루칼라 노동자가 되어) 집도 사고 결혼도 할 수 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공장으로 향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꼬집었다. 펑렁모시라는 이름의 네티즌도 "고학력 청년들의 허세가 아니라 대학을 졸업하고도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는 지금의 현실이 쿵이지 문학을 만든 것"이라고 했다.


베이징= 조영빈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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