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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파릇

입력
2023.04.01 04:30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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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보던 나뭇가지인데, 오늘은 파르스름하니 달라 보인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새로 난 여린 잎이 가지를 채워 가고 있다. 이파리가 투명할 정도로 맑다. 한 해 중 가장 고운 연둣빛으로 경쟁이라도 하듯 얼굴을 내미는 나뭇잎들, 4월을 '잎새달'이라고 이름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파르스름한 빛은 처음에는 있는 둥 마는 둥 옅은 빛을 띠다가 며칠 사이에 곧 짙은 색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감동을 담아 하는, 흔한 봄 인사가 있다. '신록의 계절에…'로 시작하는 말이다. 봄날 행사의 공식적인 인사말로, 또 신학기 학교에서 보내는 가정통신문의 첫 구절로 거의 판박이다. '신록'은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인데, 새잎만 보면 신록이란 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명한 수필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신록 예찬'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난 글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평생 쓰는 말은 자신이 배우고 겪은 범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본 것, 느낀 것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려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모양과 상태를 그려내는 우리말은 소중한 언어자원이다. 그런데 말은 마치 숨을 이어가는 생명체와 같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주 불러주지 않으면 책장 위 서류처럼 소복이 쌓인 먼지에 묻혀 버릴 수 있다.

다시 한번 나무를 올려다본다. '파릇한 잎'이 보인다. 발 앞에는 '파릇한 풀포기'가 있고, 저기 어느 들판에는 '파릇한 봄나물'이 나 있을 것이다. 조금씩 고개를 드는 파르스름한 이런 모양을 영어로는 'green here and there'처럼 구절로 묘사하는데, 우리말에서는 '파릇파릇하다'는 말 한마디면 정리된다. 상태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상당히 체계적이다. 파릇파릇은 '거뭇거뭇', '노릇노릇', '불긋불긋', '희끗희끗' 등 일정한 틀을 가진 한 무리로 당당하게 존재한다. 색은 아니지만 보드랍고 연한 모양을 말하는 '나긋나긋, 노긋노긋', 얇은 천이 나부끼는 '나붓나붓'과도 가까워 보인다.

봄은 들판에서 봄나물로 돋아난다고 한다. 파릇파릇한 산나물이 향긋한 뒷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것처럼, 파릇파릇이 난 새싹은 삶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돋우지 않는가? 오늘을 여러 번 지내고 이 파릇파릇한 새잎이 '푸릇푸릇'해질 때쯤이면, 여름이 봄의 손목을 잡고서 우리를 만나러 올 것이다.

이미향 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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