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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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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WBC에서 대활약, 오타니 선수의 남다른 인기
3월 중순 도쿄에 다녀왔다. 오래전에 잡아두었던 연구회 참석을 위해서였는데, 때마침 갑작스레 발표된 대통령의 방일 일정과 겹쳤다. 한국에서는 논란이 한창이던 우리 정부의 ‘대승적 결단’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한일 관계보다 바야흐로 결승전으로 치닫고 있던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하 WBC)이 화제의 중심이었다. 한국에서는 대표팀이 1라운드에서 탈락하면서 분위기가 순식간에 식었지만, 일본에서는 승승장구 중인 대표팀을 응원하는 분위기가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일본 대표팀이 준결승에서는 손에 땀을 쥐는 극적인 역전승으로 강팀 멕시코를 이겼고, 결승에서는 숙적인 미국과 맞대결을 벌여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일본은 ‘야구 강국’이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아마추어 야구를 즐기는 인구가 많고, 프로야구의 인기도 상당하다. 더구나 이번 WBC는 코로나19 사태의 여파로 5년 만에 개최되는 대회인 만큼 큰 관심을 끌었다. 특히 화제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대회 MVP로도 선정된 오타니 쇼헤이 선수였다. 그는 시속 160km가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이자, 매 시즌 수십 개의 홈런포를 터뜨리는 타자로, 2018년부터 미국의 메이저리그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공격과 수비의 양 포지션을 모두 소화하는, 이른바 ‘이도류(二刀流, 양손에 칼을 쥐고 공격과 수비를 하는 일본의 검술 기법)’ 선수인데, 메이저리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고 있다.
과거에도 스즈키 이치로 등 메이저리그에 뜻깊은 족적을 남긴 일본인 선수가 있었지만, 오타니 선수의 인기는 각별하다. 야구 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 종목에도 좀처럼 관심이 없던 친구마저 “그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WBC를 꼭꼭 챙겨보았다”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오타니는 야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순수하고 진지하지만, 사생활은 소탈하고 겸손하다. 때때로 고배도 마셨지만 좌절하지 않고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 왔다. 그가 거물급 선수로 성장해 온 과정에서 드러나는 성실함과 인간미에 일본인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고시엔에서 프로야구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일본 야구계
그런데 WBC 결승전이 열리던 바로 그 시간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보니, 일본 공영 방송에서는 전혀 다른 야구 경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일한 시간대에 열린 봄철 고교야구 선발대회 본선 1회차 고시엔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었던 것이다. WBC 결승전의 여파인지 화면에 비친 경기장에는 관객이 적었지만,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한 중요한 경기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공영 전파를 할애해 고교야구를 중계한다는 사실이 꽤 이색적으로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고교야구의 인기가 시들해진 지 오래다. 한때 상당히 인기를 누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1982년 프로야구 리그가 출범하면서 야구팬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고교야구가 지금도 큰 사랑을 받는다. 특히 ‘고시엔(甲子園)’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진 고교야구 전국대회는 TV로 생중계되는 전국적인 관심사다. 효고현에 있는 고시엔 구장은 한 세기 전에 고교 야구 대회를 위해 건설된 전용이다. 봄에는 고교야구선발대회의 본선 경기(‘봄의 고시엔’)가, 여름에는 고교야구선수권대회의 본선 경기(‘여름의 고시엔’)가 이곳에서 개최된다. 역시 고교야구의 절정이라면 매년 8월 폭염 속에서 개최되는 고시엔 여름 대회인데, 49개팀이 진출하는 본선 무대에 서기 위해 전국에서 무려 3천5백여 고교 야구팀이 실력을 겨룬다. 지역의 강호들이 여러 차례 합을 겨룬 뒤에야 고시엔 구장에 설 기회가 겨우 주어진다. 어린 야구 선수들에게는 고시엔에서 플레이해 보는 것 이상의 꿈이 없는 것이다. 고시엔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구장의 흙을 손수건에 소중하게 싸서 간직한다. 승패와 무관하게 꿈을 이룬 그들의 벅찬 표정을 보고 마음이 뭉클한 야구팬이 적지 않다. 사실 일본의 프로야구 리그에서 활약하는 모든 선수가 고시엔 출장을 목표로 실력을 갈고닦은 고교 선수 출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고시엔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은 프로야구 리그에서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얻는다. 일본 야구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고시엔은 훌륭한 선수로 클 만한 ‘씨앗’을 발견하고 그들을 다음 단계로 이끌어주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WBC 결승전과 겹치는 시간에 열렸던 고교 야구 경기는 ‘여름의 고시엔’보다는 위상이 한결 떨어지는 ‘봄의 고시엔’이었다. 하지만 그 구장의 흙을 밟기 위해 땀을 흘려온 어린 선수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WBC 결승전에 온 관심이 쏠리는 때에도 이 어린 선수들의 경기를 중계 전파에 실어 준 공영방송도 참 대단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는 일본 문화의 정서적 단면을 드러낸 듯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한국에도 명맥을 이어가는 전국 고교 야구 대회가 있다고는 한다. 그런데 TV 중계는커녕 이런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 무엇보다 이 대회에 출전 가능한 야구팀이 있는 고등학교는 전국에서 100곳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고시엔 예선전에 출사표를 던지는 3천5백여 고교 야구팀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숫자다. WBC에서 결과가 지지부진했던 한국의 야구 대표팀에 대한 비판도 있겠지만,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오랫동안 야구 인프라를 쌓아온 일본 야구계보다 체질이 허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 한국식 ‘결단’ 외교 vs. 일본식 ‘빌드업’ 외교
한국 사회에는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문화적 정서가 있다. 좋은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반드시 부정적이지는 않지만, 매사에 결과를 앞세우는 성급함 때문에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비해 일본 사회에는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적 정서가 있다. 지나치게 신중해서 변화의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도 있지만, 작은 것부터 하나씩 풀어 나가는 문제 해결에는 실력을 발휘한다.
사실 이런 정서적 차이가 한일 간 외교 문제에 있어서 자주 ‘삑사리’의 소지가 된다. 개인적으로 최근 한국 정부가 내놓은 일제 강제 징용 배상 문제의 ‘해법’에 대해 실망했다. 한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는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위해 과거사와 인권에 관한 문제를 억지로 덮으려는 것에는 동의할 마음이 티끌만큼도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해법’이 나온 경위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복잡하고 아픈 사안을 거칠고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것을 ‘통 큰 결단’으로 포장하는 것도 보기 흉하다.
무엇보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한국식 해법이,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일본식 ‘빌드업’ 외교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기 어려워 보인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요구에 성의껏 호응한 만큼, 그들도 선뜻 입장을 바꾸어 주기를 기대했을 듯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일본 정부는 한국 관련 외교 사안에 대해 오랫동안 자료를 축적하고 국내 여론과도 조율을 거듭해 왔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문화적 정서에서는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과정을 단 한번에 뒤집는 극적인 의사 결정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정부의 ‘결단’이 그들에게는 뜬금없고 무모한 퍼포먼스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크다. 더 나아가 그들이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준비해 온 ‘공격 카드’를 꺼낼 때가 드디어 왔다고 판단할 여지도 크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한일 간 팽팽하게 맞섰던 외교적 사안을 일본 정부의 뜻대로 뒤흔들 수 있는 계기가 생겨 버렸다. 대일 외교의 결말이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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