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7년 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튤립 심는 검찰청의 새로운 변화
추궁·압수의 거대 이미지 대신
세상과의 동행에 노력하는 모습
이런저런 보고 끝에 검찰청(대구지검 상주지청) 정원 한쪽에 튤립이 심겨 있다는 말이 나왔다. 사건, 현황, 영장, 체포, 집행 등 날 서고 딱딱한 단어들 말미에 등장한 꽃 이름이 낯설어 "튤립이요?" 되묻는다. "네, 우리 청 관리사들이 작년에 심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지금은 안 보이지만 곧 싹이 올라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사무과장이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어쩐지 검찰청 마당에 튤립이 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근무하던 어떤 검찰청에서도 튤립을 본 적은 없는데 말이다.
마침 직원 간담회에서 만난 관리사께 어떻게 검찰청에 튤립을 심으실 생각을 하셨냐고 물었다. 우연히 튤립 구근을 얻게 되어 그것을 검찰청 정원에 심었다고 했다. "작년에 심은 꽃이 올해에도 필까요?" 눈에 보이지 않은 것들을 쉽사리 믿지 않는 습관을 가진 자의 물음에 관리사는 확신에 차 대답했다. "그 땅은 물 빠짐이 좋은 땅이거든요. 올해도 문제없이 꽃이 필겁니다." 나의 의문은 그저 검찰청 같은 곳에 튤립이 피겠는가 하는 막연한 의심에 기인하지만, 관리사의 확신은 오래 가꿔온 땅의 성질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확신은 믿을 만한 것이다. 머지않아 어여쁜 튤립들이 우리 검찰청 화단에 필 것이다.
매일 출퇴근길에 지나다니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검찰청 마당을 그제야 새롭게 살펴본다. 검찰청의 기개를 상징한다는 소나무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훨씬 다양한 식물들이 제각기 자리를 잡고 있다. 크거나 작거나 강하거나 연약한 식물들이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깨닫는다. 검찰청에는 추궁하는 사람, 압수수색하는 사람, 죄를 묻는 사람과 벌을 집행하는 사람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땅의 겨를을 살펴 그에 적합한 꽃씨를 심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깨닫는 것처럼.
검찰은 자주 하나의 거대한 이미지로 상징되고 인식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거대하고 단일한 것은 실질을 다 담지 못한다. 어느 세상도 어느 집단도 납작한 하나의 성질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검찰 역시 서로 다르고 다양한 각자의 삶들이 구성하는 총합이다. 그 세세한 구성의 결들을 들여다보기를 포기하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악이나 선이라고만 인식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도 더 나은 길을 찾아갈 수도 없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각자의 검찰청이 있다. 대부분의 국민에게는 평생을 어디에 붙어 있는지 모르고 살아도 될 관공서에 불과할 것이고, 어떤 국민에게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몇 번인가 드나들어야 했을 두려운 기관일 테지만 또 어떤 누군가에는 마지막 희망을 기대어 지친 민원을 접수하러 오는 창구일 것이다. 나에게는 애를 쓴다고 쓰는데도 우리의 일이 어쩌면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될까봐서 매번 두렵고 무거운 일터다. 그리고 이 계절 관리사님께 검찰청은 꽃밭인 것이다.
검찰청 진입로를 따라 새로 설치한 화분들에 꽃모종을 심는다고 관리사들이 분주하다. 튤립이 싹을 내밀기 시작한 정원 한쪽에는 사무과장 주도로 파라솔 의자가 설치되었다. '민원인들도 앉고, 관리사들도 앉고, 우리도 가끔 앉아서 쉬게요.' 삶의 한 귀퉁이에서 검찰청을 방문해야만 하는 일이 생긴 사람들의 무거운 발걸음 옆에 꽃을 심고 넌지시 의자를 가져다 놓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검찰청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검찰은 사람들의 삶 속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먼 데서 벌어지는 검찰권의 근거와 한계에 대한 논의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이다. 그것으로 우리가 일시에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세상과 함께 살아가는 일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 출근하는 발걸음이 조금은 가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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