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차별 국가에서 아이 낳으면 뭐하나

입력
2023.03.27 19:00
26면
구독
한국노총 전국연대노조 가사·돌봄유니온 조합원들이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조정훈 의원이 발의한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이 "여성 및 인종차별적 내용을 담고 있다"며 즉각 철회를 촉구했다. 뉴스1

한국노총 전국연대노조 가사·돌봄유니온 조합원들이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조정훈 의원이 발의한 가사근로자법 개정안이 "여성 및 인종차별적 내용을 담고 있다"며 즉각 철회를 촉구했다. 뉴스1

100만 원 가사도우미, 노예제와 같아
차별 공인하는 나라에서 아이 낳고 싶나
워라밸·보편 인권 추구하는 미래로 가야


‘100만 원 가사도우미 법’(가사근로자의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출생률을 높일지는 불확실하나 ‘차별 국가’ 낙인은 확실히 남길 것 같다. 제도 원산국인 싱가포르, 홍콩을 보자. 합계출산율은 2020년 1.10명, 0.87명에 불과한 반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 온 가사도우미들이 방 없이 거실이나 목욕탕에서 자면서 장시간 노동을 하고 학대당하는 일들은 빈번히 알려졌다. 국제앰네스티, 유엔인권위원회가 보고서를 내고 외신이 보도할 정도다. 그 나라 사람들 인성이 문제라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난방 안 되는 비닐하우스에서 살게 하고 임금 떼먹기가 드물지 않은 나라, 무슬림 유학생들이 사원 짓는 것을 막으려 돼지고기 파티를 벌이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지금도 외국인 노동자 차별이 존재하는데, 최저임금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차별을 공식화하는 건 완전히 선을 넘는 것이다. 저임금 외국인 가사도우미가 “현대판 노예제”라는 정의당의 비판은 좀 과격하게 들리지만, 국적과 인종에 따라 동등한 인간으로서 권리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법은 개념적으로 노예제와 다를 게 없다. 외국인 인력을 착취해 한국 경제와 출생률을 성장시키겠다는 제국주의 선언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법안 지지자들은 ‘심각한 저출생 현실을 감안한 대안’임을 강조한다. ‘저임금을 선택할 자유’ 같은 인식이 깔려 있을 것이다. 대표발의자 조정훈 시대전환 의원은 “출산이 퇴사로 이어지는 현실에서 육아휴직을 쓸 수가 없”고 “(최저임금 월 210만 원) 비용으로는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맞벌이 청년들이 가사도우미를 쓸 수가 없다”고 강변했다. 지난해 같은 제안을 했던 오세훈 서울시장은 “과거라면 주저했을 모든 파격적인 방안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 언론은 사설에서 “이 절박한 상황에서 (시도해야 할) 과감하고 다양한 육아 대책”이라고 했다.

아니, 그렇게 절박하면, 도대체 왜 부모(엄마가 아니라)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고 노동시간을 더 단축하지 않는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0.78이란 ‘자멸 출생률’은 우리나라가 장시간 노동, 남녀 가사 분담률, 성별 임금 격차 등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을 굳건히 지켜온 결과다. 진짜 과감한 해법은 이 오랜 인습을 깨뜨리는 것이다. 가정에 할애되는 시간은 더 늘려야 하고 남성은 육아에 보조자가 아닌 책임자로 동참해야 하며 기업은 근로자의 출산과 육아를 투자로 여겨야 한다. 누군가에겐 달갑지 않을 변화이기에 파격적이고, 생활방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에 근본적이다.

전업주부가 전담하던 공짜 돌봄노동을 외국인 노동자에게 값싸게 떠넘기는 것은, 그에 비하면 얼마나 쉬운가. 일-가정의 균형이라는 미래로 가지 않고 남녀 불문 육아를 떼어내 일에만 전념케 하는 미봉책이다. 설사 출생률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외국인을 차별하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다. 외국인을 하인처럼 부리는 나라에서 자란 아이들이 세계 시민으로 보편 가치를 배우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나는 육아를 내팽개치고 일 중심으로 살던 삶을 자녀세대에게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다. 아니, 미래세대가 중시하는 가치는 이미 기성세대와 다르다. 선진국들이 워라밸, 성평등, 소수자 차별 철폐, 다양성과 보편 인권 중시의 길을 앞서 걸었을 때 그들은 성장보다 균형이 행복의 요체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아이를 낳고 싶은 나라다. ‘차별을 공인하며 아이 낳는 나라’가 우리의 선택이 되어선 안 된다.

김희원 논설위원
대체텍스트
김희원한국일보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