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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치기 좋은 나라'의 권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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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한국은 사기 치기 좋은 나라다.” 동네 술집에서나 들릴 법하지만, 놀랍게도 이는 현직 판사가 법정에서 꺼낸 말이다.
사연은 이랬다. 2019년 전북 익산 대학가에서 40대 A씨는 원룸 건물 15채를 굴리며 대학생 123명의 보증금 47억 원을 등쳐 먹는 전세사기를 저질렀다. 그는 이 돈으로 수입차를 사고, 해외여행을 다녔다. 반면 세입자들은 A씨가 가스ㆍ전기요금을 내지 않는 바람에 봄에도 떨어야 했다. 피해자 일부는 학비를 못 내 ‘강제’ 휴학했다. 판사가 A씨를 놓고 “죄질이 극히 불량하다”고 한 배경이다.
그럼에도 판사의 선택지는 적었다. 사기죄 법정형은 징역 10년 이하. 형법은 아무리 많은 범죄를 저질러도 이 중 가장 무거운 죄가 내려지는 형의 1.5배까지만 선고하는 가중주의를 택한다. 사기죄 최고형은 15년인 셈이다. 피해액이 5억 원을 넘으면 특경법상 사기 혐의를 적용해 ‘3년 이상 유기징역’에 처할 수 있지만, 이는 1인당 피해액 기준이다. 이 사건 세입자 최대 피해액은 1억여 원. 결국 판사는 징역 13년6개월을 선고하며, “악의적 사기범행에 대해선 피해 정도와 불법 크기에 비례하는 형이 선고돼야 한다”고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양형 체계에 한계가 많다는 얘기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경제범죄는 남는 장사다. 다단계 금융사기로 ‘제2의 조희팔’로 불린 김성훈 전 IDS홀딩스 대표가 받은 형량은 고작 15년. 피해액 1조960억 원 중 환수액은 692억 원이니, 교도소 연봉은 684억 원쯤 된다. 수십 명이 목숨을 끊은 ‘7,000억대 투자사기’ 이철 전 밸류인베스트코리아 대표가 1심에서 받은 형량은 8년. 이후 추가 혐의까지 합쳐 징역 14년6개월이 확정됐으나, 피해자 돈은 찾을 길이 없다. 제도권은 다를까. 2021년 자본시장법 위반으로 1심 선고된 사건 166건 중 실형은 57건(34.3%)이었다. 최근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1심에서 권오수 전 회장은 “실패한 시세조종”을 이유로 집행유예를 받았다.
‘테라ㆍ루나’ 폭락 사태의 주범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를 국내로 데려와야 한다는 주장이 공허한 이유다. 형량부터 게임이 안 된다. 한국은 경제사범 최고 형량이 약 40년인 반면, 개별 범죄마다 형을 매겨 합산하는 병과주의를 채택한 미국은 수백 년의 징역형이 가능하다. 600만 달러(약 78억 원) 폰지 사기를 친 미국 70대 회계사가 지난해 9월 받은 형량이 48년이었다.
혐의 입증도 가상화폐 증권성을 폭넓게 보는 미국이 유리하다. 우리 검찰이 테라ㆍ루나가 증권성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은 게 미 연방대법원 판례 ‘하위테스트’다. 투자자가 이익을 기대하고 돈을 넣고, 사업자가 이익을 약속하면 증권으로 볼 수 있다는 것. 자산 형식보단 실질이 중요하단 취지다. 하지만 우리 법원은 '증권성에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테라폼랩스 관계자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검찰에서 “법원조차 미온적인데 송환 여부를 놓고 한미 간 WBC 경기를 하면 이길 수 있겠냐”라는 푸념이 나오는 배경이다.
테라폼랩스에서 일했던 한인 개발자는 “권 대표는 회사에서 영어로 말하지 않으면 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실제 영어가 유창한 권 대표는 지난해 6월 트위터 계정에 “영어로만 문의해달라”고 했다. 사실상 영어가 모국어인 셈이다. 피의자 방어권 보장을 위해서도 그는 미국에서 재판을 받는 게 맞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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