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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민 80%가 싫어한다"며 해고 통보…대구 아파트서도 '경비원 인사 갑질' 논란

입력
2023.03.27 14:10
수정
2023.03.27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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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 '초단기 계약' 맺다 계약만료 통보
입주민들이 나서 경비원 해고 취소 서명
"어르신 짐 들어주고 시계도 고쳐주던 분"
"'아파트 실세' 입김으로 일자리 잃어"

관리자의 '갑질'을 폭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이 일했던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 앞에서 20일 동료 경비원들이 고인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리자의 '갑질'을 폭로하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이 일했던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 앞에서 20일 동료 경비원들이 고인을 위한 묵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경비원이 관리소장의 '인사 갑질'을 호소하다 극단적 선택을 한 가운데 대구의 한 아파트에서도 관리사무소 측이 경비원을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으로 고용하다, "주민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를 대며 해고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 아파트에선 입주민들이 나서 4년간 일했다는 한 경비원의 해고 취소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호소문. 이 아파트에서 2019년부터 4년간 근무하던 경비원 A씨는 최근 갑작스레 "주민 80%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고용계약만료 통보를 받았다. 입주민들은 A씨의 계약만료 취소 서명을 받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호소문. 이 아파트에서 2019년부터 4년간 근무하던 경비원 A씨는 최근 갑작스레 "주민 80%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고용계약만료 통보를 받았다. 입주민들은 A씨의 계약만료 취소 서명을 받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계약만료 이유 "주민 80%가 싫어한다"…입주민들이 취소 서명 나서

26일 한 온라인커뮤니티에는 '대구 경비원 갑질 도와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 주민이라고 소개한 작성자에 따르면, 2019년부터 4년간 이 아파트에서 일해온 경비원 A씨는 지난달 말 갑작스레 "3월까지만 일해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A씨는 아파트 입주민들에겐 '가족 같은 존재'였다. 작성자는 "노인분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인데, 짐도 다 들어드리고 궂은일도 도맡아해주시는 등 워낙 성실하고 따뜻한 분이라 주민들이 참 좋아하는 분이었다"며 "그런데 지난달 말 갑자기 계약만료통지서를 받았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작성자가 관리사무소에 찾아가 A씨 해고 사유를 묻자, 관리사무소는 "주민 80%가 싫어해 해고한 것"이라고 답했다.

알고 보니 A씨는 그동안 3개월마다 재계약하는 방식으로 4년간 일해왔고, 이번 계약만료는 입주자대표회의에서 A씨에 대한 재계약을 하지 않도록 관리사무소 위탁업체에 의견을 전달해 결정된 것이었다. 입주자대표회의 측은 "이미 결정된 일"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관리사무소 측의 '인사 갑질'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진 A씨가 근무했던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경비초소 모습.

관리사무소 측의 '인사 갑질'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14일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진 A씨가 근무했던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경비초소 모습.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 전형적인 갑질 유형

작성자는 이번 사건이 A 경비원이 숨지지 않았을 뿐, 서울 강남 아파트 갑질 사건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했다. 3개월짜리 초단기 계약은 경비노동자들에 대한 갑질이 지속되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인사 갑질을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한 강남구 아파트 경비원도 최근 3개월짜리 단기 고용 계약을 맺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작성자는 23일 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호소문과 함께 '해고 취소 동의 서명'을 붙였다. 호소문에 "2019년부터 4년간 우리 아파트에서 성실히 일해오신 ○○○ 아저씨(체구가 작고 서울 말씨를 쓰심)께서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항상 밝게 인사해주시고 어르신들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시고, 아파트의 크고 작은 일을 책임지고 우리 곁을 지켜주시던 가족 같은 분이었다"고 썼다.

이어 "경비원 아저씨에게 ○○아파트는 생계다.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가장인 경비 아저씨의 손을 잡아주는 품격 있고 따뜻한 입주민이 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며 "해고 취소에 동의하시는 분은 동의서에 서명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관리소장님과 동회장님께선 입주민대표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일이라고 답변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경비원 아저씨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리 입주민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도록 용기를 내보았다"고 호소했다.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엘리베이터에 붙여둔 '경비원 해고 취소 동의' 호소문 위에 관리사무소 측 '물탱크 청소' 등을 덧대 붙여둔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대구 달서구 한 아파트 입주민들이 엘리베이터에 붙여둔 '경비원 해고 취소 동의' 호소문 위에 관리사무소 측 '물탱크 청소' 등을 덧대 붙여둔 모습.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관리사무소 측, 호소문과 동의서 보이지 않게 '물탱크 청소' 등 공고 덧대

A씨를 안타깝게 여긴 건 작성자뿐이 아니었다. 총 790가구인 이 아파트에선 나흘 만에 390명이나 이 해고 철회 요청 서명에 동참했다. 그러나 관리사무소 측은 서명에 동참하는 이들이 늘자, 오히려 이 호소문이 보이지 않도록 위에 '물탱크 청소 안내' 등 다른 공지문을 덧대거나 훼손했다고 한다.

작성자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누군가의 가장인 경비아저씨가 소위 실세라는 몇몇의 입김에 파리 목숨이 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며 "이게 갑질이 아니면 뭐가 갑질인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찢어진 호소문과 응답 없는 관리사무소를 보면서, 동대표도 아무것도 아니라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기분으로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낀다"며 "비슷한 사례의 아파트분들이 있거나 관련하여 조언 주실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다"고 호소했다.

이 글에는 이 아파트 입주민들을 응원하는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아파트 택배기사라고 밝힌 한 누리꾼은 "A 경비아저씨는 택배기사들에게 항상 고생한다고 격려해주셨던 분"이라며 "더운 날에는 얼음물도 선물받고 추운 겨울엔 따뜻한 커피 한 잔도 얻어먹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그 작은 체구로 수레 가득 빈 박스를 옮기는 등 솔선수범하고 주민들에게 선풍기나 시계 같은 것들을 고쳐주기도 했던 선하디선한 분"이라며 "입주민이 아니다 보니 도와드릴 수 없었는데 주민분들이 이렇게 애써주시는 것을 보니 배송하다 말고 찡해진다. 부디 아저씨를 도와달라"고 남겼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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