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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마다 꺼낸 헬싱키의 마법, 이번엔 북한을 홀릴 수 있을까[문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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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북핵과 남북경제협력, 북한 인권 문제를 삼위일체 목표로 추진하는 ‘한반도형 헬싱키 프로세스’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김영호 통일부 통일미래기획위원장(2023년 3월 15일)
“헬싱키 프로세스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깊은 영감을 준다.”
문재인 전 대통령(2019년 6월 19일)
참 묘한 데자뷔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동북아 평화 구축을 위한 교훈”이라며 치켜세웠던 ‘헬싱키 프로세스’를 윤석열 정부 새 통일전략을 수립하고 있는 김영호 위원장도 벤치마킹 대상으로 언급했습니다.
적과의 동침인가요.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한반도 정책은 지향점이 상당히 다릅니다. 문 정부는 남북미 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적대적 긴장과 전쟁 위협을 없애고 비핵화를 이루려 했죠. 반면 현 정부는 대북 지원의 문은 열어 뒀지만, ‘힘에 의한 평화’를 강조하며 북한의 도발에 ‘강대강’으로 대응합니다. 김정은 정권이 껄끄러워하는 인권 문제도 대놓고 제기하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죠.
이처럼 서로 대조적으로 비치는 대북 철학을 가진 두 정부가 같은 모델을 참고하려는 셈입니다. 도대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프로세스가 얼마나 마법 같은 매력을 갖고 있기에 정권마다 앞다퉈 꺼내드는 것일까요.
1975년 헬싱키에서 미국을 비롯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과 소련 중심의 바르샤바동맹 회원국 간 협약을 체결한 뒤 15년간 이를 실행한 과정을 헬싱키 프로세스라 부릅니다. 헬싱키 협약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이 서로 군사적 긴장수위를 낮추려고 체결했는데요.
그 배경에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있습니다. 소련이 핵미사일을 미국 본토 코앞인 쿠바에 배치하려 하자 미소가 격하게 대치하며 핵전쟁 일보직전까지 갔죠. 핵어뢰 등을 탑재하고 쿠바로 향하던 16척의 소련 함정이 뱃머리를 돌리며 다행히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이 사태를 계기로 ‘언제든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죠.
이후 소련은 1968년 ‘프라하의 봄’(체코슬로바키아의 자유화운동) 사태를 겪으며 불안감이 고조됩니다. 소련이 무력개입하며 진압했지만, 동유럽의 공산권 대오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나토 회원국과 바르샤바 조약국이 1972년 11월 헬싱키에 모여 앉습니다. 안보 보장과 경제 협력 확대 등을 논의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에 참석한 것인데요. 그런데 왜 하필 핀란드였냐고요? 우리에겐 천연 감미료인 자일리톨과 사우나의 나라로 알려졌지만 사실 핀란드에는 ‘중재 DNA’가 있습니다. 홍기준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는 “핀란드는 소련 등 강대국 틈에 낀 지정학적 위치 탓에 역사적 부침을 수없이 겪었다”면서 “이 때문에 평화사상이 강해 자유·공산진영 간 긴장완화를 위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3년간의 협상 끝에 1975년 헬싱키 정상회의에서 협약이 체결됩니다. 모두 10개의 원칙으로 이뤄졌는데요. △국경선 불가침 △분쟁의 평화적 해결 △경제·과학·기술 협력 등 촉진 △사상·양심·신념의 자유 보장 같은 원칙이 포함됐죠. 현 상황을 인정하고 교류 수준을 높여 가자는 게 핵심이죠. 데탕트(냉전 당시 미소 간 긴장 완화)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로 인해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당시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인권 규범'이 그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일종의 나비효과를 만들어낸 겁니다. 다양한 민간단체들이 헬싱키 협약을 근거로 동유럽 국가의 인권을 감시하고 압박한 것이죠.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지원한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이 대표적입니다. 사하로프는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린 핵물리학자이지만 훗날 회의감을 느껴 인권운동에 뛰어들었고, 1975년엔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인물입니다. 모스크바 헬싱키 그룹은 소련 당국에 헬싱키 협약상 인권 조항을 지키라고 촉구하면서 소련 정부의 반체제 인사 체포·투옥, 언론 보도 통제, 수용소의 가혹한 노동 환경 등을 고발했습니다.
김영호 위원장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구소련 서기장과의 정상회담에서 ‘헬싱키 협약에 따라 소련의 인권 문제가 개선돼야 한다’고 말하는 등 체제의 비인간성에 대한 압박이 거세졌고, 결국 공산권 붕괴의 큰 원인이 됐다”고 진단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14년 이렇게 회고했죠.
“헬싱키협약은 소련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공격이었다.”
헬싱키 프로세스가 냉전을 끝내는 데 큰 역할을 한 건 분명합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역대 진보와 보수 정권은 협약의 어느 대목이 냉전 종식의 결정적 방아쇠를 당겼는지를 두고 다른 해석을 하고 있죠.
우선 진보 정권들은 '신뢰와 교류, 대화를 통한 평화 구축의 과정'에 주목합니다. 헬싱키 프로세스는 자유-공산 진영이 정치·군사분야에서 신뢰를 쌓고, 군비통제 등을 이끌어 긴장을 완화해 구소련이 개혁·개방을 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정책이었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헬싱키 프로세스와 닮았다고 봤죠.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7년 6월 "헬싱키 프로세스가 동북아지역 평화체제의 모범이 될 수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반면 윤석열 정부는 헬싱키 프로세스를 '인권'에 초점을 맞춰 바라보는 듯합니다. 김영호 위원장은 "그동안은 북한의 핵과 경제적 지원을 맞바꾸는 식의 대북정책이 주를 이뤘다"면서 "경제협력뿐 아니라 인권 문제까지 묶어 논의해야 우리 입장이 국제적으로도 공감받을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정부는 북한 인권 문제를 반복적으로 거론하다 보면 김정은 정권이 무너질 수 있다는 기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북유럽에서 벌어졌던 것처럼 말이죠. 다만 윤석열 정부는 이런 의도를 공개적으로는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인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보편적 권리입니다. 북한 주민이 일상에서 겪는 탄압, 군대나 수용소 등에서의 유린 행위는 규탄받아 마땅합니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문제는 인권문제를 우리 정부가 정면으로 거론하는 게 한반도 평화나 북한 주민들의 삶에 실질적 도움이 될지 여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윤석열 정부는 북한 인권 상황을 정확히 알려야 인권이 개선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월 통일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우리 국민과 국제사회에 정확히 알리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는데요. 북한의 실상에 대한 외부세계의 이해와 공감대가 확산되면 이후 부메랑 효과가 되어 다시 북한 내부로 우려가 전달돼 주민들의 의식이 높아질 수도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정부가 북한 인권을 직접 비판하는 게 전략적으로 득이 될 게 없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홍 교수는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가장 시급한 건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나오게 하는 것"이라면서 "북한이 도발 수위를 높이고 있는데 우리 정부가 인권 문제까지 공식 제기하면 북한을 자극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정부의 역할 조절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인권은 보수진보를 떠나 당연히 지지해야 할 가치이지만 자칫 북한을 자극하면 주민들의 실질적 권리가 더 악화될 수 있다”면서 “이런 상황을 고려해 나온 절충안이 민간단체가 인권문제를 제기하되 정부는 뒤에서 도와주자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북한이 인권 문제에 가뜩이나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상황에서 정부가 직접 나서는 건 실질적인 인권 개선 효과를 만들어 내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70년이 지나도록 풀지 못한 숙제입니다. 진보 진영이든 보수 진영이든 한결같이 헬싱키라는 주문을 앞세워 각자의 방법론으로 북한을 공략할 전략을 짜왔고 또 새로 짜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아직은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죠. 헬싱키 프로세스를 다시 꺼내든 윤석열 정부가 이번에는 얼마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줄지 지켜봐야 할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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