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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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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옮기는 발걸음 사이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작고 조심스럽지만 예사롭지 않은 한 여성의 노랫소리였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저쪽, 꽃들이 만개한 목련 나무 아래 벤치에서 중년 여성이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듯했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꽃 그림자와 인적 끊긴 박물관 마을의 고요가 맞물려 그의 노래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지금 내가 저쪽으로 가면 여성은 부르던 노래를 멈출 터였다. 바로 옆 골목으로 고양이처럼 숨어들었다. 다행히 여성은 누군가 자신의 노래를 훔쳐 듣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봄밤, TV를 보다 말고 산책 나온 참이었다. 나이 먹느라 힘이 드는 건지, 세상이 갈수록 지저분해지는 건지, 뉴스를 시청하는데 견디기 힘든 무력감과 두통이 몰려왔다.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나는 화가 날 때 흔히 내뱉는 말 "아우, 혈압 올라!"가 관용어인 줄만 알았다. 아니었다. 성질 돋우는 상황과 맞닥뜨리면 불장의 주식 차트처럼 체내 혈압이 수직으로 솟구친다는 걸 갱년기에 접어든 내 몸이 실증해줬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속상한 말들로 가득한 뉴스를 보다가 혈압을 재니 오후만 해도 정상이던 수치가 '145/98'로 껑충 뛰어버렸다. 그 사실이 또 나를 열 받게 했다.
지난가을 병원에서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던 순간, 나도 모르게 죽상을 했던 것 같다. 의사 선생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시한부 판정받은 사람처럼 굴어요? 비타민 부족하면 비타민제 먹고 눈 떨리면 마그네슘 보충하잖아요. 혈압도 똑같은 거예요. 혈압이 높다 싶으면 혈압약 먹는 거죠. 그리고 혈압약 복용하는 비율은 말이죠, 연령대와 정비례한다고 보면 돼요. 즉 주변 친구들 절반 이상이 이미 혈압약 먹고 있다는 얘기예요." 특이한 방식으로 나를 안심시키면서 그이는 두 가지를 주문했다. 매일 두 차례 이상 혈압을 잰 후 리스트를 작성해서 다음번 진료 때마다 제출할 것, 심신이 찌뿌드드하다 싶을 때는 만사 제쳐두고 걸을 것. 두 가지만 성실하게 지켜도 혈압은 잘 관리될 거라고 그이는 단언했다. 그리하여 밤이고 낮이고 기분 나쁜 일이 생기면 30분씩 걷는 걸 습관으로 들이는 중이었다.
한데 오늘 밤, 큰길 건너 이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노랫소리를 들었다. 벽에 기대어 선 채 홀로 누리는 이 호사를 한갓 산책과 견줄 수 있을까?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여성은 노래를 2절까지 이어갔고, 나는 잔잔한 파도 위를 유영하듯 가사에 빠져들었다. 안온하고 쓸쓸했다. 잊히지 않을 봄밤을 선물해준 이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사이 노래를 마친 여성이 통화를 계속했다. 들어보니 오랜 친구로부터 노래를 요청받은 듯했다. "이 노래가 널 위로한다니 내가 고맙지 뭐. 그나저나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망정이지,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니?" 거기까지 통화를 엿듣고 나자 앞에 나설 용기가 사라져 버렸다. 살금살금 돌아서서 왔던 길을 되짚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TV는 어느새 스페인 산골 마을의 일상을 비추고, 창밖 서쪽 하늘 끝에서는 초승달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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