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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한국군 증오비를 위령비로... 교류에 진심 '풀뿌리 외교'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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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청주에서 베트남 며느리, 아들과 함께 사는 백원기ㆍ박종미씨 부부는 6년 전 베트남 중부 빈딘성 꾸이년(Quy Nhon)에서 겪은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뜩하다. 아들(40) 여자친구 팜티람(33)의 가족을 만나 혼사를 논의하러 날아간 터였다. 상견례 자리는 화기애애할 것이란 예상이 빗나갔다. 람씨 가족은 물론 구경 나온 동네 사람들도 경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심지어 대화 도중 람씨의 남동생들과 작은아버지는 “배를 타러 가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어머니 박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결혼이 성사되지 않을 줄 알았다”고 했다.
반세기 전 베트남전쟁은 한국과 베트남을 ‘악연’으로 묶이게 했다. 특히 맹호부대 등 한국군의 활동 무대가 된 꾸이년은 막대한 민간인 피해를 낳아 반한 감정이 심한 지역이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는 내용의 한국군 증오비도 세워졌다. 유태현 전 주베트남 대사는 26일 “20년 전만 해도 한국대사가 이곳에 들르면 베트남 공안(경찰)이 호텔 주변을 밤새 지켰다”며 “한국에 원한을 품은 피해자 측의 복수를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 꾸이년 주민들은 한국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18일 화상통화로 만난 람씨의 어머니(61)는 “딸이 한국 사람과 결혼한다고 해 걱정이 컸지만, 이제는 가족뿐 아니라 이웃들도 가장 좋아하는 나라가 한국”이라며 웃었다.
변화는 서울 용산구의 노력에서 시작됐다. 구는 용산에서 창설된 맹호부대의 꾸이년 상륙 사실을 고리로 1996년 교류의 물꼬를 텄다. 주민들은 처음엔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20년 넘게 꾸준히 문을 두드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한국군 증오비는 ‘위령비’로 바뀌었고, 2016년 신도시 도로에는 용산구 이름이 붙었다. 꾸이년시는 용산국제교류사무소와 세종학당 공간도 만들어줬다. 또 신설된 꾸이년대 한국어학과는 높은 경쟁률로 첫 신입생을 받았다. 윤성배 용산국제교류사무소장은 “과거를 굳이 들추지 않으려는 중앙정부나 기업과 달리 과거사를 직시하고 교류에 나선 것이 비결”이라며 “자매결연 30년을 앞둔 지금 꾸이년 주민들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 더는 논의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주제를 놓고 지자체나 도시끼리 교류하며 상생을 추구하는 ‘지방외교(Subnational Diplomacy)’가 뜨고 있다. 용산구 사례처럼 지자체는 국가와 기업이 외면하는 외교적 장애물을 극복하는, 완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자국우선주의 기류가 공고해지면서 붕괴된 국가 간 협력사슬은 지방외교의 대안적 가치를 더욱 부각시켰다. 지방외교는 다층적ㆍ다원적 협력 네트워크가 갈수록 중요해지는 글로벌 추세에도 부합한다.
이미 국내 광역ㆍ기초 지자체들은 양자ㆍ다자 방식으로 다양한 외교활동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시도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광역 17개, 기초 225개 등 242개 국내 자체단체가 세계 85개국 1,350개 도시와 우호협력을 맺었다.
용산구 외에도 상호 신뢰를 토대로 국가 간 외교의 빈틈을 메우는 성과는 여럿 나왔다. 대구 수성구는 2018년 호주 시드니에서 30㎞ 떨어진 자매결연 도시, 블랙타운시의 왕립공군기념공원에 태평양전쟁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했다. 시도협의회 관계자는 “추모비 자체가 전범국가 일본을 부각하는 효과가 있어 일본 정부와 기업들의 반대가 많았지만, 1994년부터 이어진 두 지자체의 끈끈한 협력까지 훼손할 순 없었다”고 말했다.
충남도는 지난해 9월 추석 직후 순천향대 아산캠퍼스에서 중국 유학생 초청행사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코로나19 방역 조치 등을 두고 한중관계가 냉랭한 상황에서도 장기적 관점에서 민간 우호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추진됐다. 충남도 관계자는 “미래에서 온 큰 손님을 모신다는 생각으로 행사를 기획했는데, 반응이 좋아 올해도 열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화 외교부 공공외교 대사는 “외국을 상대하는 공공외교는 다양한 행위 주체의 참여가 없으면 반쪽짜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지방외교를 국가 외교의 한 축으로 키우기 위해 광역ㆍ기초자치단체 협의체, 행정안전부 등과 협업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재외공관 정도나 지자체 국제교류에 관심을 보이던 몇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양자외교의 성과는 ‘다층적 외교’로 확장되기도 한다. 5월 4일을 ‘한국 이민자의 날’로 지정한 멕시코가 좋은 사례다. 주멕시코 대사관 관계자는 “2021년 연방하원에서 한국 이민자의 날을 제정할 때 반대 의견이 많았으나, 인천시와 교류하던 메리다시가 2019년부터 한국의 날을 제정해 놓은 덕에 힘을 받았다”면서 “지방외교의 묘미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날은 1905년 1,000여 명의 한인 ‘에네켄’이 멕시코 땅에 처음 발을 디딘 날로 1세대 한인 이민자들의 독립정신도 함께 기려 뜻이 더 깊다.
해외에선 일찌감치 지방외교가 국가외교의 파트너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높은 효율성이 입증됐기 때문이다. 동남아국가연합(ASEANㆍ아세안) 사무국의 리융융 지역문제국장은 “아세안이라는 지역협의체 안에서 시장 및 주지사 협의체가 별도로 운영된다”며 “하부 외교가 활성화하면 신속하고 긴밀한 협력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연계해 U(Urban)20 시장회의가 열리는 것도, 세계보건기구(WHO) 플랫폼이 있지만 최근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 건강도시 파트너십 시장회의’에 오세훈 서울시장이 참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백지아 서울시 국제관계 대사는 “시민들의 건강에 직접적 영향을 주는 지방정부들이 주체가 된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면서 “선언적ㆍ상징적 차원의 국가외교보다 협력 의미는 더 클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외교가 중앙정부의 전유물인 시대는 저무는 분위기다. 에밀리아 사이즈 세계지방정부연합(UCLG) 사무총장은 “국제기구나 국가가 기후, 환경 등 큰 정책을 결정하지만 실행 주체는 각 도시와 지방정부”라며 “도시ㆍ지방정부 간 협력은 앞으로도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UCLG는 140개국 25만 개 지자체와 170여 개 협의체가 회원으로 참여하는, 지방정부의 유엔으로 불리는 국제기구다. 곽성일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전략실장은 “한국의 인도ㆍ태평양 전략의 핵심 목표가 중층적 협력 네트워크 구축인데 지방정부끼리 교류도 한 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국가와 지방, 두 외교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결합돼 외교적 성과를 극대화하느냐에 있다. 세계 각국이 지방과 국가 외교의 연계성 강화를 위해 분주한 이유다. 미국이 대표적이다. 미 하원은 2019년부터 ‘지방외교법(City and State Diplomacy Act)’ 도입을 추진하고, 트루먼센터를 중심으로 한 싱크탱크들은 국무부 내 지방외교실을 설치하는 등 양측의 소통을 넓혀 나라 전체의 외교력을 제고하는 데 힘쓰고 있다.
한국도 시도협의회가 주축이 돼 올 초 지방외교자문위원회를 꾸리는 등 본격적인 지방외교 시대 개막을 준비 중이다. 이철우 시도협의회 회장은 “지역과 글로벌이 같이 움직여야 성과를 낼 수 있는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시대가 도래했다. 외교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해 10월 대전 UCLG 총회 개막식에서 “지방정부의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이라며 “지방정부가 국제무대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적극 뒷받침하겠다”고 공언했다.
서정인 전 주아세안 대사는 “미중 충돌 등 국제사회의 대립 격화로 한국의 운신 폭은 여전히 좁다”면서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한다(Think Globally, Act Locally)는 글로컬 전략 아래 지방정부의 교류ㆍ협력망을 적극 활용해야 위기를 돌파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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