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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을 정물화에 그린 까닭은…'아름다움'으로 남긴 삶의 비극

입력
2023.03.21 10:00
15면

<17> 반짝이던 짧은 삶의 추억, 바니타스 정물화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라틴어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학폭 문제를 다룬 화제의 드라마 '더 글로리'에 이 말이 나오면서 최근 더 널리 알려졌다. 가해자 중 하나인 손명오의 목에 ‘메멘토 모리’ 문신이 있는데, 동급생을 폭행하던 명오가 이 말을 새긴 이유는 허세였을 것이다. 패거리 내에서 정작 열등한 위치에 있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나한테 까불면 죽음을 선사하지!”라며 으름장 놓는 치기 어린 갑옷이다. 명오가 목에 파스를 붙이면서 ‘멘토’라는 말이 가려지고 ‘메 모리(me mori)’만이 보이자, 피해자 동은이 “이제는 다른 뜻이 되었구나”라고 말한다. ‘메 모리’는 스페인어로 “나는 죽었다”는 뜻이 된다. 허세를 가리고 남은 것은 필멸의 최후다. 명오처럼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을 허세로 사용한 사람들은 과거에도 있었다. 심지어 미술사에 남아 있다. 16, 17세기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것이다.

아드리안 반 위트레흐트, '꽃과 해골이 있는 정물화', 1643년, 개인 소장

아드리안 반 위트레흐트, '꽃과 해골이 있는 정물화', 1643년, 개인 소장


17세기 유럽 화가들의 생존을 위한 선택, 바니타스 정물화

바니타스(vanitas)는 공허, 헛됨, 가치 없음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구약성경 전도서 1장 2절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구절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죽음과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 바니타스 예술은 미술사의 처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줄곧 등장했지만, 통상적으로는 17세기 네덜란드 지역에서 유행했던 ‘바니타스 정물화’로 대표된다. 정물화의 역사 또한 인류의 역사와 궤적을 같이한다. 다만, ‘움직이지 않는 사물을 그린 그림’이라고 정의되는 정물화가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자리잡은 것은 17세기 바로크 시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7세기 유럽의 정물화 유행은 우연이 아니었다. 불연속적인 역사적 사건들이 맞물리면서 파닥이는 나비처럼 태어난 미술 양식이었다. 13세기 유럽인들의 약 30%가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은 후 겨우 역병을 수습하고 정신을 차릴 무렵인 15세기에는 동방의 이슬람 세력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며 교황 중심의 세계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6세기의 시작은 종교개혁이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한 이후 스위스, 영국 등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16세기 유럽인들은 대규모 해양탐험으로 신대륙을 발견하고 활발하게 교역과 무역을 시작했다. 중세시대의 중심이었던 가톨릭 사제들과 귀족들은 점차 힘을 잃기 시작했다. 청렴과 금욕을 중시하는 신교도들과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가진 신흥계급이 성장하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선택을 해야 했던 직업군이 있었다. 바로 화가들이었다.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 '바니타스 정물화', 1680년대.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 '바니타스 정물화', 1680년대.


헨드릭 안드리에센, '바니타스 정물화', 1650년대, 미국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 미술관 소장

헨드릭 안드리에센, '바니타스 정물화', 1650년대, 미국 마운트 홀리오크 대학 미술관 소장

당시 플랑드르(네덜란드)의 예술 시장은 도제식 길드 공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공방들은 일종의 그림 공장이었다. 성서와 신화의 이야기를 주문했던 교회와 귀족들이 줄어들었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그림이나 조각상이 우상이라며 성상파괴운동을 벌였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이전보다 먹고사는 일이 어렵게 되었다.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그림의 주문이 줄어들었다. 이제는 새로운 고객이 필요했다. 화가들은 새로운 부유층, 새로운 지식층의 입맛에 맞는 장르를 찾아야 했다. 공방의 화가들이 선택한 새로운 아이템은 일상을 소재로 하는 풍경화, 장르화(풍속화), 그리고 정물화였다. 그중에서도 인기 상품이 바로 바니타스 정물화였다. 신화나 성서의 인물 대신, 새로운 무역로를 통해 얻은 값비싼 향신료와 동방도자기, 금은보석과 귀한 식자재, 그리고 여기에 죽음을 암시하는 해골, 촛대, 시계를 함께 배치하는 정물화는 새로운 고객층을 만족시켰다. 화려한 소품과 해골이 그려진 바니타스 정물화는 요즘으로 치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는 인증샷과 같았다. 은쟁반과 금시계, 지구본과 유리공예품 등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면서도, 당시 새로운 가치관으로 자리잡고 있던 ‘겸손과 청렴’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자신의 윤리적, 철학적 소양을 보여주는 바니타스 정물화는 거실이나 서재에 걸어 두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나 이렇게 돈도 많은데, 또 이렇게 철학적이기까지 하단다!”라는 일종의 허세이기도 했다. 물론 진심 어린 겸손함으로 두개골이 들어간 정물화를 주문했던 고객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17세기 조선 문인들의 정신적 피난처, 고동서화와 기명절지

바니타스 정물화가 한창 유행하던 17세기, 북유럽의 지구 반대편에 살던 사람들은 어떤 그림을 벽에 걸었을까? 흥미롭게도 17세기 동북아시아에서도 헤게모니(주도권)가 변화하는 혼란 속에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물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1644년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섰다. 한족들은 그들이 오랑캐라고 불렀던 여진족에게 나라를 넘겨줘야 했다. 한족 중심의 세계관이 힘을 잃기 시작했고, 같은 시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두 차례 호란을 겪었다. 서유럽이 함선을 타고 바다를 가르고 있을 때 중국, 조선, 일본은 살아남기 위해 거친 시절을 겪으며 새로운 가치관을 품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있었다. 이 시기 동서양 모두 정치적 대혼란 직전에 ‘소빙기’라 불렸던 기후변화를 겪었다. 재해와 기근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죽음을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경험했다. 동서양 모두 기술의 발전에 따른 ‘삶의 풍요’와 불가항력적 죽음이라는 ‘삶의 덧없음’을 모두 몸소 체험하면서 사물의 물성(物性)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00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그림에게 물은 사대부의 생활과 풍류'에 따르면, '16, 17세기 유럽과 마찬가지로 중국과 조선에도 상류층의 사물에 대한 고급 취미로서 고동서화(古董書畵)가 본격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고동서화'는 골동품을 뜻하는 고동과 글씨와 그림을 의미하는 서화를 함께 묶어 쓴 것이다. 조선 사대부의 고동서화 취미는 18세기에 이르면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경쟁적이었으며, 19세기에는 장승업의 ‘기명절지(器皿折枝)’ 그림이 크게 유행했다. 골동 그릇과 꽃을 그리는 기명절지와 함께 ‘책거리’ 그림의 유행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사대부의 고동서화 취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 명나라의 붕괴, 조선 궁정의 당쟁 혼란 등 세속을 벗어나 탈속의 풍류를 즐기려는 도피적 선택일 수도 있다. 18세기 학자 이정섭의 '저촌집'에는 '요즘 사람들은 고서화를 많이 모으는 것을 고상한 취향으로 삼아 누가 한 조각 비단 화폭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만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구입하여 농짝을 가득 채우고 대나무 상자가 넘치게 하여 보물처럼 자랑하며 수장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장승업, '기명절지', 19세기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승업이 시작한 기명절지 그림은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치며 20세기 초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장승업, '기명절지', 19세기 조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장승업이 시작한 기명절지 그림은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치며 20세기 초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이응록, '책가도', 8폭 병풍, 19세기 조선, 개인 소장. 이응록은 이형록, 이응록, 이택균 순으로 개명한 조선시대 화원이다.

이응록, '책가도', 8폭 병풍, 19세기 조선, 개인 소장. 이응록은 이형록, 이응록, 이택균 순으로 개명한 조선시대 화원이다.


동서양의 정물화,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예술 의지

그러나 값비싼 골동품 기물과 꽃, 서책을 그렸다고 해서 이것을 '동양의 정물화'라고 통칭해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양 미학에는 정물화라는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슷한 역사적 시기에 비슷하게 남겨진 정지된 사물 그림들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프랑스 릴 대학의 미술사학자 창밍펑 교수가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에 보낸 기고문 '정물, 살아 있는 자연'에 잘 설명되어 있다. 창밍펑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17세기의 동서양 모두 사물의 덧없는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동서양의 철학적 관점은 달랐다. 서양의 경우, 플라톤이 ‘육체는 영혼의 무덤’이라며 주장했던 영혼불멸설,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황제 철학자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던 ‘메멘토 모리’ 문구처럼 반드시 죽음을 맞게 되는 인간의 비극성에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서양의 정물화에는 잘리거나 꺾인 꽃, 썩고 있는 과일, 해골 등이 상징적 도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동양의 경우, ‘인간은 자연과 조화로운 합일을 이룬다’는 인식적 틀에서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 구조 안에 있는 인간의 죽음에 주목했다. 그런 이유로 동양의 화조도, 사군자에 살아 있는 그대로의 꽃, 손상되지 않은 과일이 상징적 도상으로 등장한다. 서양의 정물화는 기독교적 도덕성을, 동양의 정물화는 유교적 도덕성을 상징한다는 차이는 있을지라도, 동서양 모두 유한한 인간 존재의 비극성을 ‘아름다움’으로 남기려는 목적은 같다고 볼 수 있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죽음도, 영원히 끝나지 않고 돌고 도는 죽음도 결국은 똑같은 비극이다. 유한한 삶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동일하게 품는 예술 의지였을 것이다. 정지된 사물을 그린 정물화는 그래서 예술적이다.

정물화는 새로운 기술과 경쟁하지 않는다. 사진기는 그림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발명품이다. 사진의 등장은 그림의 거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 기록을 위한 그림보다는 표현을 위한 그림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현대미술에서 정물화는 그 어느 때보다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사진기의 등장에 경악했던 당시 사람들이 “곧 화가라는 직업은 사라지겠구나!”라며 탄식했지만 화가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술자라는 신분에서 예술가라는 지위를 획득했다. 최근 미드저니, 달리와 같은 이미지생성 인공지능의 등장에 “앞으로 예술가라는 직업은 사라지는가?”라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확답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림의 의미와 창작 방식에 그 어떤 변화가 있을지라도, 정지된 사물을 담은 정물화의 기본 공식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정물화를 직접 그려보면 알게 된다. 어떤 사물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느 방향의 빛(조명)을 얼마만큼 설정하고 구성할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다. 아이들이 미술시간에 정물화를 그리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이러한 ‘관점’이다. 정물화는 새로운 기술과 경쟁하지 않는다. 정물화는 ‘관점’과 경쟁한다. 인공지능은 인류가 남겼던 무수한 그림을 데이터로 활용하며, 인간이 지시한 관점에 따라 이미지를 생성할 뿐이다.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는 여전히 무한한 것을 꿈꾸며 어떻게든 그림을 만들고(혹은 생성하더라도), 감상할 것이다. 바니타스 정물화를 남겼던 그들이 그랬듯이, 화선지에 사군자를 그렸던 저들이 그랬듯이.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미드저니’ 무료 서비스를 이용해 16일 직접 생성한 '스마트폰과 음료수가 있는 바니타스 정물화'.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미드저니’ 무료 서비스를 이용해 16일 직접 생성한 '스마트폰과 음료수가 있는 바니타스 정물화'.



송주영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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