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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에게 말해도 안 먹힌다"... 숨진 20대 선원의 절규 [선원이 없다]

입력
2023.03.20 12:00
수정
2023.03.20 12:1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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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등 항해사 수는 선장의 절반
선장·기관장 고령화까지 겹쳐
정부, 선원정책혁신TF 꾸려 대응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모습. 삼성중공업 제공

삼성중공업이 건조한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모습. 삼성중공업 제공

한때 멋과 낭만, 부의 상징이던 ‘마도로스’가 사라지고 있다. 선장·기관장이 항해사·기관사보다 많은 역삼각형 구조에다, 선장·기관장의 고령화까지 겹친 탓이다. 커지는 선원 부족 위기에도 선사는 국제 수준을 밑도는 근무 여건·임금 개선에 여전히 주저하고, 해양수산부는 마땅한 유인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마저 쉬쉬하는 열악한 근로 환경은 마도로스 이탈 행렬에 불을 지피며 소멸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수급 불균형 악화... 선장·기관장 육성 막혀

컨테이너선과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원유·석유화학제품을 운송하는 탱커선 등 외항 상선은 국내 수출입의 99% 이상을 담당한다. 해운업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한국 산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해기사가 없어 선박을 운항하지 못하는 경우까지 발생할 수 있다. 해기사는 선장·기관장·항해사·기관사 같은 간부 선원을 말한다.

현재 외항 상선 선장은 1,221명(2021년 기준)이다. 하지만 아래 직급으로 내려갈수록 인원은 급감한다. 1등 항해사 1,049명→2등 항해사 721명→3등 항해사는 659명이다. 역삼각형 구조는 기관장~기관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일 한국해양대 선원연구센터장은 “처우가 열악하니까 1급 항해사·기관사로 올라가기 전에 80~90%가 그만둔다”며 “지금이야 어떻게든 굴러가지만 10년 후 외항 상선 인력난은 정말 심각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선장·기관장의 월평균 임금은 1만1,791달러(약 1,500만 원), 1급 항해사는 8,471달러로 주요 선원 공급국인 폴란드·루마니아의 절반 수준이다. 다른 선박의 임금 수준도 국제 평균을 밑돈다.

수급 불균형의 씨앗은 2007년 싹을 틔웠다. 당시 선박 소유자 단체인 한국선주협회와 선원 노동자 단체인 전국해상산업노동조합연맹은 단계별 외국선원 고용 정원 확대에 합의했다. 국적 선박 수가 빠르게 늘어 한국인 선원이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대신 선박을 국가필수국제선박·지정국제선박·일반국제선박으로 나눠 일정 규모의 한국인 선원을 고용하도록 했다.

현재 전시에 물자 수송을 담당할 국가필수국제선박 88척은 선장·기관장 포함 해기사 8명을 모두 한국인으로 고용해야 한다. 노사 합의로 승선 인원을 정한 지정국제선박 212척은 기관사·항해사 중 1명만 외국인으로 쓸 수 있다. 나머지 일반국제선박은 선장·기관장을 제외한 기관사·항해사도 모두 외국인으로 채울 수 있다.

이 센터장은 “대적으로 인건비가 싼 외국인 2, 3급 해기사를 들여오면서 결과적으로 한국인 시니어(선장·기관장·1급 항해사·기관사) 육성 길목을 막아 버린 게 됐다”고 지적했다. 실제 2007년만 해도 선장과 1, 2급 항해사 수는 800여 명으로 비슷했다. 현재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해기사는 3,500여 명 안팎이다. 대형선에 보통 항해사·기관사 6명이 승선하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다.

국적별 이주선원 누적 이탈률. 그래픽=신동준 기자

국적별 이주선원 누적 이탈률. 그래픽=신동준 기자


폐쇄적 조직·부족한 워라밸로 유출 가속

전문가들은 약 10년 후면 국적 외항 상선이 1,500여 척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2010년 최종 확정 후 10년 넘게 제자리인 국가필수국제선박·지정국제선박 수를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늘어난 시니어 해기사 일자리를 채우려면 2, 3급 항해사·기관사를 육성해야 하고, 이를 통해 해기사 부족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영우 한국해기사협회 해기인력정책연구소장은 “노사 합의에 맡긴 현재 방식을 바꿔 해수부가 몇 년 주기로 국가필수국제선박·지정국제선박 수 범위를 정하면 노사가 그 안에서 정하는 식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영국·독일처럼 선원 임금의 소득세를 면해 주거나, 승선 기간 대비 휴가 기간을 확대하는 등 선원 업무의 매력을 높이는 유인책도 필요하다. 국내 LNG운반선의 경우 6개월 연속 근무하고 2개월 휴가를 갖지만, 영국 선사는 3개월 일하고 3개월 쉰다. 전 소장은 “국내에서 어렵게 육성한 1급 항해사·기관사를 유럽계 선사에 다 빼앗길 상황”이라고 말했다.

군대와 같은 폐쇄적 조직문화도 개선할 점이다. 2018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해상을 지나던 선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3등 기관사 구민회(당시 25세)씨는 사망 전 “기관장이나 윗사람들에게 말해도 안 먹힌다”며 친구들에게 막막한 심경을 토로했다. 함께 배를 탔던 2급 기관사는 구씨에게 선상근무수칙을 수기로 써오게 하거나 보일러 작업을 시키며 매일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수십 일 동안 써온 항해·기관일지를 처음부터 다시 적게 한다거나, 방 청소 검사 명목으로 서랍을 뒤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1급 기관사 김모씨는 “해기사를 배출하는 곳이 한국해양대와 목포해양대, 해사고 등으로 적기 때문에 혹시라도 찍힐까 봐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고, 회사에서도 구두경고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해수부도 해기사 부족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올해 1월 차관을 팀장으로 한 선원정책혁신태스크포스(TF)를 꾸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해당 TF는 원격의료 확대, 과거 배를 탔던 해기사 대상 복귀 프로그램 운영, 승선 기간을 줄여 사회와의 단절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다. 해수부 관계자는 “외항 상선 선원에 대한 소득세 비과세 범위(현재 300만 원)도 확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산= 변태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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