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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시위로 불편하다는 당신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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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사회가 장애인 권리를 보건복지 이슈가 아닌 기본 인권의 문제로 공식화한 건 50년 전부터다. 유엔 총회는 1975년 ‘장애인 권리선언’을 채택했고, 대한민국 국회는 98년 말 ‘장애인 권리헌장’을 제정했다. 그 전까지 인류가 장애인에게 ‘베푼’ 것은 말 그대로 시혜였고, 거의 모든 근대 헌법들이 기본권의 주체로 상정한 ‘시민(국민)’과 48년 세계인권선언의 ‘모든 인간’에 장애인은 예외적 존재거나 ‘2등 시민’이었다. 장애인이 겪는 차별은 사회적 차별 때문이 아니라 개인의 딱한 사정 즉 지체-지적 결함 탓에 각자가 감당해야 할 불가항력의 운명이었다. 그 인식이 한때 백인의 흑인에 대한, 나치의 유대인에 대한 인식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거였다.
저 거대한 문명사적 변화와 진전을 위해 긴 세월 수많은 이들이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미국 장애인 인권운동가 주디스 휴먼(Judith Ellen Heumann, 1947.12.18~2023.3.4)도 그중 한 명이었다. 생후 18개월 되던 때 앓은 소아마비로 평생 두 다리로 서 본 적 없는 그는 1970년 소송을 통해 미국 최초 중증 장애인 공립학교 교사가 됐고, 만 22세 여성으로서 그해 ‘행동하는 장애인(Disabled in Action)’이란 단체를 설립해 이끌었다. 그는 미국 장애인 인권법의 양대 축이자 문명사적 변화의 기점으로도 꼽히는 73년의 미국 ‘재활법(Rehabilitation Act)’과 90년 ‘장애인법(ADA)’을 비롯, 수많은 장애인 관련 법-제도의 진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클린턴·오바마 정부의 장애 정책 관료로도 활약했다. 숱한 장애인 단체와 활동가들을 이끌었고, 책과 칼럼, 팟캐스트 등을 통해 장애를 못 보거나 안 보려는 시민의 눈을 밝히는 데도 앞장섰다.
그는 “어떤 이들은 내가 세상을 바꿨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내가 한 일은 세상이 내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지 규정하는 데 순응하지 않은 것뿐이다. 나는 그런 시도에 맞서 언제나 소란 떨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2020년 자서전 ‘나는, 휴먼(Being Heumann)’에 썼다. 전 세계 수많은 장애인 활동가들의 ‘록스타 같은 존재’였다는 주디스 휴먼이 별세했다. 향년 75세.
그의 이름이 처음 세상에 부각된 것은 70년 뉴욕 공립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탈락한 직후였다. 시교육위원회는 구술-필기시험을 통과한 그를 신체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양쪽 하지 마비)했다. 휠체어 교사는커녕 장애인 학생조차 드문 시절이었고, 한 여성 면접관은 휴먼에게 ‘어떻게 화장실에 갈 수 있는지 시범을 보여줄 수 있겠느냐’고 묻기도 했다고 한다.
70년 4월 뉴욕타임스에 그의 사연을 소개한 짤막한 칼럼이 실렸다. “강의 내용을 암기해야 하는 시각장애 학생, 휠체어로 등·하교하는 지체장애 학생들은 우리 사회가 영웅으로 떠받드는 운동선수들의 용기를 뛰어넘는 결단력을 보여준다. 만 22세 소아마비 장애인 주디스 휴먼은 전동휠체어를 타고 대학을 우등 졸업했고 청소년 교정 독서 교사로 봉사활동을 해왔다.(…) 장애가 있든 없든 배우고 가르치려는 열망이야말로 교육의 첫걸음일 것이다.” 한 지역 매체는 ‘소아마비 장애인은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은 될 수 있어도 교사는 될 수 없다’는 제목의 기사로 교육위 비판에 동조했다. 몇몇 인권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아 소송을 제기했고, 수많은 장애-비장애 시민들이 편지 등을 통해 그를 응원했다. 휴먼은 한 인터뷰에서 “생색내듯 우리에게 교육받을 기회를 준 뒤 우리를 묻어버리려는 사회의 위선에 순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위는 결국 조치를 번복, 휴먼에게 교사 자격증을 부여했다. 그해 미국 최초 휠체어 장애인 고교 교사가 된 휴먼은 소송 투쟁 중 알게 된 이들을 주축으로 그해 말 ‘행동하는 장애인’이란 단체를 결성했다. 그는 만 3년 교사로 재직한 뒤 장애의 진실을 일깨우는 사회의 교사가 되고자 전업 활동가로 나섰다.
베트남전 반전 이슈에 가려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장애인 ‘재활법’도 당시 현안 중 하나였다. 장애인 사회 통합을 위한 직업 재활, 고용-생계 지원 등을 규정한 저 법안에는 훗날 장애인 인권운동의 ‘희망의 등대(beacon of hope)’라 평가받은 ‘504조(section 504)’ 즉 ‘연방 정부 재정 지원을 받는 모든 기관 단체(관공서·학교·병원·우체국 등)는 장애를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포괄적 권리를 규정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1차대전 장애인 참전군인을 위한 직업재활법(1920)의 확장 버전으로 의회가 마련한 저 법안에 당시 대통령 닉슨은 2차례나 서명을 거부했다.
닉슨의 재선 대선 직전이던 1972년 11월, 주디스는 회원들과 함께 뉴욕 매디슨가 인근 닉슨 선거운동본부 앞 도로를 점거한 채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도심 시위로 맨해튼 전역의 교통이 거의 마비될 정도였지만, 뉴욕경찰(NYPD)은 강제해산은커녕 닉슨 선거본부의 정확한 위치를 안내하는 등 시위대를 도왔다. 훗날 주디스는 “당시 우리는 명백히 도시를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들이었지만, 경찰은 총격 등 피해로 재활 물리치료를 받는 동료들을 통해 우리 주장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은밀한 방식으로 우리를 지원했고, 우리로 하여금 장애가 시민 모두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고 말했다. 닉슨은 이듬해 당선 직후 재활법에 서명했다.
하지만 닉슨 정부도 후임 제럴드 포드 정부도 ‘504조’의 시행규칙 제정-시행을 외면했다. 모든 공립 학교와 대학, 병원, 관공서에 휠체어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를 설치할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게 이유이자 명분이었다. 장애인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504조 시행을 공약으로 걸고 76년 출범한 민주당 지미 카터 정부 역시 공화당 정부와 다를 바 없었다. 카터의 첫 복지부장관 조지프 캘리파노(Joseph A. Califano Jr.)는 ‘규칙 정비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장애인 단체들은 ‘77년 4월 4일’을 시한으로 그 전까지 규칙을 시행하지 않으면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4월 5일에 애틀랜타, 시애틀 등 미국 주요 10개 도시에서 시위와 농성을 시작했다. 휴먼 등이 이끈 샌프란시스코의 150여 명 시위대는, 대부분 사나흘 만에 시위를 끝낸 나머지 도시와 달리, 캘리포니아주 복지부 청사에서 4월 30일까지 무려 26일간 점거농성을 지속했다. 미국 역대 최장 비폭력 연방건물 점거농성이었다.
연방-주 정부는 빌딩을 봉쇄하고 전기와 전화선, 상수도까지 차단했다. 대부분 상시 돌봄과 의료 서비스를 받아야 했던 중증 장애인 농성 시위대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버텼다. 농인들은 수화로 건물 밖 시민들과 소통했고, 심리적 고립감을 떨치기 위해 휠체어 경주를 벌이며 함께 웃었다. 샌프란시스코 당시 시장(George Moscone)은 농성장에 매트리스와 간이 이동 샤워시설을 제공했고, 인권단체들은 의약품과 먹거리를 지원했다. 뉴욕타임스가 2020년 뒤늦은 부고의 주인공으로 주목한 브래드 로맥스(Brad Lomax, 1950~1984)도 농성대의 일원이었다. 앨라배마 출신 흑인으로 60년대 흑인 시민권 운동에 가담했던 그는 만 18세에 발병한 다발성경화증으로 장애인이 된 뒤로도 블랙 팬서스 당원으로 활동한 인물. 블랙 팬서스는 조직원이 포함된 농성대에 갈비와 프라이드치킨 등을 공급하고, 기관지를 통해 주류 언론보다 훨씬 열렬히 농성의 명분과 당위성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훗날 휴먼은 “모든 인권운동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그를 통해 배웠다”고 말했다.
휴먼이 이끈 25명은 농성장을 빠져나와 워싱턴D.C 의회 앞 시위를 병행했고, 의회 특별청문회 증언대에도 섰다. 휴먼은 “우리는 정부가 더 이상 장애인을 차별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법이 법대로 시행되기를, 분리-차별이 지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부측 대표로 나온 이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이렇게 덧붙였다. “제 말을 이해도 못하면서 마치 공감한다는 듯 끄덕이는 고갯짓은 삼가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농성 24일째인 4월 28일, 캘리파노 장관은 504조 시행규칙에 서명하며 “비로소 장애인 자립과 권리를 가로막아온 불의의 장애물들이 법에 의해 무너진 새로운 평등의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농성대는 D.C 파견대의 복귀를 기다리며 자신들이 어지른 농성장을 직접 청소하고 집기들을 정리한 뒤 30일 함께 해산했다.
만 13년 뒤인 1990년 7월, 미국 정부는 504조 의무를 사기업을 포함한 미국 시민사회 전역으로 확산한 ‘장애인법(ADA)’을 제정했다. 당시 대통령 조지 H.W. 부시는 법안 서명 기자회견에서 “배제-차별의 모든 부끄러운 장벽을 다함께 허물자”고 말했다.
“장애는 사회가 마땅히 보장해야 할 것들,
일할 기회와 이동의 권리를 제공하지 못했을 때
비극이 될 뿐이다.”
주디스 휴먼, 1987년 인터뷰에서
헬렌 켈러에게 앤 설리번이 있었던 것처럼, 휴먼도 수많은 이들의 부축을 받았다. 정육점을 운영해 가족을 부양한 아버지와 지역 사회 활동가 어머니가 그 처음이었다. 독일 유대인으로 30년대 나치 탄압을 피해 각각 미국으로 건너와 결혼한 부부는 정치-사회적 불의와 차별에 무척 예민했고, 식탁에서도 늘 정치 이슈로 토론하며 아이들에게도 부당함을 겪거나 보면 맞서 싸우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그들의 1녀 2남 중 첫째가 휴먼이었다. 부부는 첫 딸의 하지 마비를 진단한 의사의 제안, 즉 당시 관행대로 수용시설에 보내라는 권유를 외면했다. 잇달아 태어난 두 아들과 최대한 똑같이 대하며 키웠고, 매년 여름 장애 청소년 캠프(Camp Jened, 레터에서 상술)에 보내 학교에서 배울 수 없던 훨씬 값진 것들을 배우게 했다.
물론 세상은 달랐다. 만 5세의 휴먼이 타고 온 전동휠체어를 본 유치원 원장은 ‘화재 위험(fire hazard)’을 들어 휴먼을 외면했다. 화재 대피 위험이 아니라 휠체어 발화 가능성을 염려한 거였다. 만 9세에야 입학을 허락받은 초등학교에서도 휴먼은 지하 특수학급에서 다른 장애인들과 더불어 지내야 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부모 특히 어머니는 휴먼보다 뜨겁게 분노하고, 항의하며, ‘네 탓’이 아니라며 딸을 격려했다. 훗날 휴먼이 했던 말 - “장애는 사회가 우리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것들, 예컨대 일할 기회와 이동의 권리를 제공하지 못했을 때 비극일 뿐이다. 내게 휠체어 생활 자체는 결코 비극이 아니다” - 은 그의 체험에서 비롯된 신념이자 부모의 가르침이었다. 그는 학교가 장애인에겐 가르치지 않던 것들을 가정교사에게서 배웠고, 69년 뉴욕 롱아일랜드대를 졸업한 뒤 70~73년 공립학교 교사로 근무한 뒤 75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대학원(공중보건학)을 졸업했다.
휴먼은 대학원 졸업 직후 걸출한 장애인 인권운동가 에드 로버츠(Ed Roberts, 1939~1995) 등과 함께 미국 최초 장애인 자립-자활단체 중 하나인 ‘독립적인 삶 센터(Center for Independent Living)’를 조직해 이끌었고, 83년 국제 장애인 단체 연대기구인 국제장애인위원회를 설립해 만 10년 공동대표로 일했고, 미 상원 노동-공공복지 위원회를 비롯한 정부기관 단체의 장애인 관련 입법-정책을 조언했다.
유치원 입학마저 거부당했던 그는 클린턴 정부의 교육부 장애인 특수교육 및 재활 서비스 담당 차관보(1993~2001)로 일했고, 세계은행 장애-개발 특별 자문관(2002~06)으로서 휠체어로 거의 전 대륙을 누비며 각국 장애인 정책을 거들었다. 버락 오바마 정부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부에서도 국제장애인인권특별보좌관(2010~17)으로 활동했고, 2017~19년 포드재단의 시니어 펠로로서 ‘포용을 위한 로드맵: 미디어 속 장애인의 얼굴 바꾸기’란 문건을 공동 집필했다. 그 문건은 미디어에 의해 강화되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고정관념 개선, 장애인 대표성 확장 방안 등을 다룬 기념비적 논문으로 지금도 널리 읽힌다.
휴먼은 ADA 30주년이던 2020년 ‘나는, 휴먼(Being Heumann)’(공저)을, 이듬해 청소년판 ‘구르는 전사(Rolling Warrior)’를 잇달아 출간했다. 미국 최초 휠체어 장애인 브로드웨이 배우 앨리 스트로커(Ali Stroker)의 목소리로 녹음한 오디오북도 냈다. 그의 책은 4파전 끝에 최근 애플 TV가 영화 판권을 사들였다.
휴먼은 많은 인권 관련 상을 수상했고, 로욜라대 코엘류 장애 법률 정책 혁신센터가 2021년 제정한 장애학생인권상(Heumann-Armstrong Award)에 이름을 올렸다. 학교 등에서 겪는 장애 차별(Ableism)에 맞선 청소년과 대학생, 즉 제2, 제3의 휴먼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그는 91년 한 장애인 행사장에서 만난 멕시코 출신 지체장애인 활동가 호르헤 피네다(Jorge Pineda)와 92년 결혼, 자녀 없이 해로했다.
평생의 투쟁으로 얻은 법-제도 진전보다 더 값진 성취를 그는 장애인으로서의 존엄과 자부심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사회라는 사실”을 장애인 스스로, 또 세상이 깨닫게 된 것이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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