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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로맨스, 그에겐 스릴러...평등하지 않다면 유혹은 공포다

입력
2023.03.25 04:30
11면

<110>플러팅(Flirting)이 '사랑의 문을 여는 노크'가 되려면

연애 예능 '솔로지옥' 시즌2에서 출연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연애 예능 '솔로지옥' 시즌2에서 출연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넷플릭스 제공

모처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분명 한국을 떠날 때는 날씨가 꽤 추워서 다들 패딩을 입었는데, 돌아와 보니 너무 갑자기 봄이다.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탄 게 비행기가 아니라 타임머신이었나. 한국에 있던 친구는 경칩을 지나 개구리가 깨어나기 시작하면서 갑작스러운 봄이 왔다고 했다. 역시 절기는 과학이라며 봄볕을 만끽하다보면 스멀스멀 개구리마냥 깨어나는 마음이 있다. 바로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다. 연애 경험이 없을 때도, 이별에 가슴 아플 때도, 심지어 연애를 하고 있을 때도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면 괜히 사랑 타령을 하고 싶어진다. 개중에도 이제는 아주 아득하기만 한 사랑의 시작에 대해 주책 부려 보자.

Love Is an Open Door~

우리는 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될까? 사고처럼 단박에? 아니면 가랑비 옷 젖듯이 서서히? 이유는 알 길 없고 과정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사랑에 빠지는 것은 불가항력이다. 우리는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깊이도 모를 사랑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짝사랑도 충분히 즐겁지만, 조금 더 관계를 진전시켜 보고 싶다면 사랑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서야 한다. 다만 그 좋은 일이 쉽게 주어질 리 없어서, 어지간히 운이 좋지 않고서야 그 문을 열기 위한 혼신의 발버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진솔하게 연락처를 물어보거나 뜨거운 눈빛으로 빤히 쳐다볼 수도 있고 실없는 농담과 은근슬쩍 스킨십에 애정을 담아 보낼 수도 있다. 우리가 흔히 ‘수작’이라고 부르던 이런 시도를 요새는 플러팅이라고 한다. 플러팅의 묘미는 관계에 변화를 만들기 위해 적당히 내 호감과 매력을 드러내면서 또 동시에 상대가 호기심을 잃지 않도록 선을 잘 넘나드는 데에 있다. 성공적인 플러팅은 사랑의 문을 열게 하지만 그렇지 못한 플러팅은 문인 줄 알고 들어가다 벽에 머리를 부딪힌 것 같은 고통과 쪽팔림을 선사한다.

위치한 곳이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

플러팅은 어렵다. 그래서 또 재밌다. 지독한 사랑꾼인 나는 친구들과 자주 어떤 플러팅을 시도했고 또 실패했는지 노닥거리길 좋아한다. 그 이야기의 장르는 대개 코미디와 로맨틱 코미디를 넘나들지만 때로 스릴러가 끼어들기도 한다. 고작 밥 한 번 먹었을 뿐인데, 갑자기 늦은 시간 찾아와 집 근처를 서성인다거나, 일터에서 다짜고짜 연락처를 물어 난처하게 만들고 완곡한 거절에도 일단 한 번만 만나보자며 무작정 들이대는 이들 때문에 고통받았다는 경험담이 흔하다. 주변에 이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해도 ‘배부른 소리’나 ‘자랑’한다며 별일 아닌 취급을 하거나 심지어 남성들의 그런 모습을 ‘순정’, ‘순수’로 포장하여 도리어 한 번 만나보라며 부추기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나 역시도 천진무구하게, “걔가 그래도 형들한테는 참 잘해~”라는 말로 친구들의 복장을 터지게 한 경험이 수두룩하다.

위치한 곳이 다르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 형한테는 참 깍듯하던 그 후배가, 자신의 후배는 쥐 잡듯이 잡는 경우를 보았던 게 한두 번이던가. 밖에서는 젠틀하고 평범한 사람도 친밀한 관계 내에서는 상대를 복종시키려 하거나 감정적으로 착취하고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흔하다. 2022년 미국의 한 출판사가 올해의 단어로 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를 조작해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행위)을 선정했다 하고 우리 사회에도 이 단어가 유행어처럼 번졌으니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이 예삿일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친밀한 관계에 의한 여성 살해, 하루에 한 명꼴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정도가 아니다. 작년 한국여성의전화 상담통계 분석에 따르면, 여성폭력 가해자 절반 이상(53.2%)이 친밀한 관계((전)배우자 41.9%, (전)애인 11.3%)였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같은 기간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최소 86명, 살인미수 등으로 살아남은 여성은 최소 225명이다. 2020년 데이트폭력 신고 건수는 1만8,945건, 스토킹 검거 건수는 481건이다. 요약하면 하루에만 데이트폭력이 52건, 스토킹은 한 건 이상씩 발생하고 심지어는 하루에 한 명꼴로 친밀한 관계에 의해 여성이 살해되거나 살해 위기에 처한다는 것이다. 좀처럼 이런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에는 앞서 나와 같은 주변인들의 천진무구한 무지가 한몫한다.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2019 가정폭력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로부터 폭력 피해를 경험한 응답자 중 폭력에 ‘별다른 대응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경우’가 45.6%였다. 그 이유로 대부분 ‘배우자니까(21.9%)’, ‘대응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아서(14.9%)’라고 응답했다. 폭력 대응으로 주위에 도움을 요청한 경우는 고작 1%뿐이었다. 이 1%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냐는 물음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서 말리거나 신고하겠다고 바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연인처럼 보인다면? 많은 사람들이 주춤한다. 이 주춤함에는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그저 ‘사랑싸움’, ‘집안일’ 정도로 취급하며 외면하고 방관하던 문화가 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 아래, 폭력은 숨겨지고 피해자는 외면을 내면화한 결과가 바로 이 1%를 만들었다.

어떤 폭력은 보이지 않는다. 아니, 보이더라도 별것 아닌 일로 여겨지거나 ‘그러길래 왜 그런 사람을 만났어’라는 말로 피해자를 탓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플러팅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문을 여는 노크가 아닌, 안전한 공간에 울려퍼지는 낯선 이의 발소리처럼 두렵게 느껴진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런 현실로 인해 플러팅에 앞서 무엇이 구더기이고 무엇이 장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중대사가 되는 수준이니, 플러팅이 마냥 즐겁거나 낭만적이기는커녕 두렵고 불편한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한 친구는 애초부터 이런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피하기 위해 새로운 모임에 참여하는 날이면 애인이 있는 척, 왕방울만 한 반지를 약지에 끼고 간다고 했다.

2023년 대한민국 합계출생률 0.78명이 내 주변 친구들에게 그닥 놀랍지 않은 이유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

하나 페미니스트가 이런 문제에 손 놓고 있을 리 없다. 세간에는 페미니스트라 하면 사회 부정의에 투쟁하느라 노상 진지하고 사랑 따위는 모를 것같이 이야기하지만, 오해다. 내 주변의 페미니스트들로 쉽게 일반화해 보면, 이들만큼 사랑과 연애에 진심인 사람들이 또 없다. 주변 페미니스트 친구들은 젠더폭력이 난무하는 험난한 현실과 젠더권력의 위계 사이에서도 어떻게든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전달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투박하게나마 자신의 무해함을 보여주는 말들을 골랐고, 상대에게 매력을 어필할 때에도 지나치게 ‘남성적인’ 또는 ‘여성적인’ 모습을 보이려 했던 건 아니었는지 되새기며 괴로워했다. 이렇게 안 그래도 어려운 사랑이 더 어려워지던 때에 이 글을 만났다.


우리는 다시, 나혜석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이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남녀는 어떻게 자유롭고 평등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49쪽)
플러팅과 유혹은 상대방이 내가 절대로 소유할 수 없고,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타자라는 것을 인정해야 가능한, 말하자면 커뮤니케이션의 근원적 불가능성 속에서 추구하는 일시적 가능성의 세계인 것이죠. (114쪽)

김신현경, '이토록 두려운 사랑'

젠더살롱에 글을 연재 중인 김신현경 교수의 책 ‘이토록 두려운 사랑’ 내용 중 일부다. 나와 친구들은 이 책을 보며, 그간 우리를 괴롭게 하던 것이 비단 개인의 서투름과 모자람 때문만은 아니었단 사실에 위로받았다. 누군가에게 플러팅이 단순 호불호를 넘어 불편함과 두려움으로 다가온 이유는 상대가 나를 소유하려 들지는 않을까, 젠더폭력의 피해자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막막함 때문이었다. 아주 사적이고 사소하게만 여겨지던 우리의 플러팅도 성별을 둘러싼 우리 사회 현실과 결코 무관할 수 없다. 하나 이것이 결국 사랑의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나혜석의 질문을 뒤집으면, 세상이 나아질수록 우리의 사랑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니, 그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게다가 그 멋진 일이 상대와 눈높이를 맞추고 미지의 존재인 서로를 탐구하는 플러팅에서 시작될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낭만적인가!


당신에게도 플러팅할 계획이 있다면, 여전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는 플러팅이 간절하다면, 지금 필요한 건, 느끼한 멘트도, 설득력을 부여하는 외모도, 유치한 경제력 과시도 아닌 나혜석의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위한 고민과 다짐 섞인 대답 그뿐이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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