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카메라, 우연한 해방

입력
2023.03.16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최근에 친구들과 출사를 다녀왔다. 평소에도 숱하게 사진을 찍긴 하지만, 사진 찍기를 위한 외출, 그러니까 '출사'라는 이름으로 밖을 나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필름 값이 너무 비싸졌다며 툴툴거리면서도 여전히 필름 카메라를 찍는 우리는 볕이 가장 예쁠 세 시쯤 만나, 제주 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라생태숲으로 향했다. 다행히 맑은 하늘과 적당한 기온을 가진 날이었다.

2년 전, 처음으로 중고 필름 카메라를 장만했다. 지금은 총 3대를 갖고 있는데 두 대는 재작년에, 한 대는 작년에 구매한 것이다. 굳이 여러 대를 갖게 된 건, 기종마다 다른 고유의 특징을 느끼고 싶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첫 카메라가 이유 없이 고장 나는 걸 겪은 후 카메라의 수명을 미리 알 수 없구나, 하는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늘 카메라를 애지중지했기에 무척 억울했는데, 당시 카메라를 고쳐주셨던 수리 기사님은 "원래 카메라는 갑자기 고장 나는 거예요"라며 태연했던 기억이 있다.

오래된 물건이라 쉽게 고장 나고, 간편함과는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계속 붙들게 만드는 필름 카메라의 매력은 무엇일까. 필름 특유의 따뜻한 색감, 아날로그 감성과 물성이 주는 쾌감 같은 것도 그 매력에 한몫하겠으나 그보다는 '불확실성'이라는 특징이 내겐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진을 찍자마자 그 사진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고, 필름을 현상해야지만 결과를 볼 수 있다는 것. 내게 그것은 불편함이라기보다 하나의 놀이 같다.

"여기 봐봐." 친구는 카메라에 눈을 대고 한참을 서서 나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한다. 숨을 고르고 찰칵, 셔터를 누른다. 스마트폰이라면 '하나는 건지겠지!' 하며 연속 사진을 찍을 수 있을 텐데 필름 카메라는 그저 신중을 기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서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촘촘히 살펴보고, 셔터를 누르기 전에 뷰파인더를 통해 대상을 더욱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러면서 사진의 결과보다는 내가 놓인 실제 순간에 더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필름 한 롤당 36장 정도의 사진이 담긴다. 한 땀 한 땀 찍다 보면 36장을 다 찍는 건 의외로 오랜 시간이 걸리고, 현상하러 가기가 은근히 귀찮아서 다 쓴 필름이 몇 롤은 쌓여야 현상소에 찾아간다. 그러면 사진을 찍은 시점과 확인하는 시점이 보통 멀어지는데, 현상하고서야 마침내, 과거에 찍었던 사진들을 마주하면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든다. 인물 사진을 찍었을 땐 친구들에게 사진을 보내주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기쁨도 있다.

최근 현상한 사진들을 본다. 대충 찍었는데 의외로 잘 나온 사진, 신중히 찍었어도 영 아니다 싶은 사진이 수두룩하다. 내 의지 밖의 우연에 기대어 벌어진 결과를 보는 일은 어쩐지 즐겁다. 힘을 풀고 단순하게, 굳이 잘할 필요 없는 일을 취미 삼는 건, 모든 걸 계획하고 통제하며 살아온 자신에게 해방감을 심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출사 날, 또 카메라 한 대가 고장 났다. 예전 같았으면 전전긍긍했겠지만, 이제는 과거 수리 기사님의 태연함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 또한 내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것. 순간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초연함, 고치면 될 일이라 담담해지는 것. 어쩌면 필름 카메라를 다루는 일과 삶을 다루는 일은 꽤 닮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김예진 북다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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