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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가 한국인들은 차별과 혐오에 익숙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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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변해야 개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 어설픈 희망을 품기보다 ‘사회 탓’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비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민낯들' 등을 써낸 사회학자 오찬호가 4주에 한번 ‘사회 탓이 어때서요?’를 주제로 글을 씁니다.
한 방송에서 차별을 주제로, 차별하지 말자는 강연을 했는데 시청자 게시판이 시끄러웠다. 원어민 교사를 채용하는 한국의 영어 유치원에서 ‘백인만 지원 가능’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을 언급한 걸 문제 삼았다. 내 아이가 발음 좋은 백인에게 영어 배우는 게 왜 잘못이냐는 논리였다. 황당했지만, 슬프게도 동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명명백백 차별 사례가, 한국에선 ‘차별이 아닌 차이일 뿐’이라면서 반박당한다.
어떤 한국 사람이 흑인을 낯설어하고, 그래서 편견을 지우지 못해 교육적 선택 과정에서 인종변수를 불필요하게 고민할 수는 있다. ‘속으로’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내는 것, 게다가 당당한 건 차원이 다르다. 싫다는 감정은 개별적인 것으로 취급할 순 있지만, 그게 날카롭게 표출되어 차별의 연료가 되고 불평등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 방해가 된다면 ‘내 감정’은 누군가를 향한 혐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표현의 자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평등해지기 위한 사회적 합의이지 ‘우리와 우리가 아닌 이들’을 선명하게 구별하고 수직으로 배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근 대구의 주택가에 이슬람 종교시설이 건축되는 과정에서 논란이 많다. 입장표명이야 주민에게 주어진 권리일 거다. 토론을 통해 ‘주거권’이라는 개념이 촘촘하게 형성된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입장을 관철시키고자 돼지머리를 갖다 놓고 야외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는 등 특정 종교를 향한 ‘의도가 분명한’ 행동은, 혐오가 아닌 단어로 해석하기 어렵다. 차별에 적합한 기질이라도 지닌 거라면, 누구든 배척할 거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특정 종교, 인종, 지역을 따져가며 지켜야 할 선을 넘는다. 그 분별력, 사회로부터 학습했다.
책 ‘한 번은 불러보았다’는 차별에 익숙한 한국인의 속마음이 구축되는 과정을 역사의 실타래를 벗기면서 살펴본 후(1부), 그게 어떻게 진화했길래 겉으로도 주저 없이 표출되는지를 정교하게 고찰한다(2부). 인종 개념은 처음부터 우열의 잣대를 품은 채 수입되었다. 이 기준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고난의 시기에는 동경해야 하는 피부색깔을 알려 주었고, 경제성장과 문화적 도약으로 위상이 달라지면서는 ‘당했던 것처럼’ 아래를 무시해도 되게끔 작동했다. ‘K-어쩌고’라는 말들이 많아질수록, 특정 사람을 주변으로 밀어내려는 공기는 넓게 부유한다.
인종차별이 심각하다는 주장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스럽다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덮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본인이 잘하면 다들 잘 대해주지 않냐, 그러니 차별은 없다는 식이다. 저자는 전작 ‘아시안이라는 이유, 혐오와 차별의 정치학’(후마니타스)을 통해 백인에게 ‘덜 차별받는 게’ 유일한 생존전략이었던 한국인들의 미국생활 분투기를 고찰한 바 있다. 차별이 심하면, 차별에 적응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이를 보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오찬호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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