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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에서 읽는 엘리엇의 '벗겨진 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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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송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건 인문학적 교양입니다. '문송'의 세계에서 인문학의 보루로 남은 동네책방 주인들이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책을 읽는 행위뿐 아니라, 책이라는 사물을 좋아합니다. 텍스트와 별개로 디자인, 인쇄 및 제본 방식, 종이, 판형 등이 독특한 책은 읽는 즐거움을 몇 배로 만들어 주곤 하지요. 최근, 책방 독서모임에서 무척 흥미로운 '책 속의 책'을 만났습니다.
매주 목요일 오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샌드라 길버트, 수전 구바, 북하우스, 2022) 낭독모임을 하고 있어요.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메리 셸리 등 19세기 영미 여성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다룬, 1,000페이지가 넘는 이 벽돌책을 여럿이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는답니다. 지난해 10월에 시작해 어느덧 스물세 번의 모임을 가졌는데요, 얼마 전 조지 엘리엇에 관한 부분을 읽다가 '벗겨진 베일'(조지 엘리엇, 민음사·2019)이란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정확히 한 달 후면 자신이 죽을 것을 예견한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단편소설입니다. 미래를 내다보고 타인의 생각을 읽어내는 능력을 가졌지만 유일하게 내면을 들여다볼 수 없었던 한 여인을 사랑하며 일어나는 이야기예요. 얼핏 로맨스 같기도 하나, '베일'이 벗겨지면 증오와 공포,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하게 되는 '고딕 소설'(공포와 로맨스 요소가 결합된 소설)이랍니다. 인물들의 예리한 심리묘사에 빠져들어 단숨에 읽힐 뿐 아니라,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아들, 연인 부부관계와 가스라이팅, 계급사회, 생명 윤리 등 이야기 전반에 드러나는 다양한 논제를 가지고 독서토론해 보고 싶은 책이기도 해요.
"무지한 사람과 지적인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은 언덕 아래로 물이 흐르는 이유를 아는지 여부"라는 선생의 말에 대한 주인공의 생각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는 지적인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 전혀 없었고, 물이 흐르는 것만 봐도 즐거웠다.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며 조약돌 사이로 물살이 굽이쳐 초록색 수초를 감싸는 모습은 한 시간이라도 구경할 수 있었다. 무엇 때문에 물이 아래로 흐르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름다움이 그에 합당한 존재 이유를 지니고 있으리라 강하게 믿었다." 고독과 우울을 달래기 위해 알프스 호수 한가운데로 유유히 배를 저어 나가곤 했던 그가 시인의 감수성을 제대로 분출할 수 있었다면 조금 달라진 운명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고전문학은 여러 출판사 판본이 있으면 고르기도 어렵고 두꺼우면 심적인 부담이 있게 마련인데, '벗겨진 베일'은 선택지가 딱 하나인 데다 70여 쪽 분량으로 얇아서 휴일 독서에 제격이었습니다. '워터프루프북'이라는 독특한 물성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덤이었고요. 물에 젖지 않는 책이라니! 스쿠버 수첩이나 방수 지도처럼 버려지는 돌을 재활용한 미네랄 페이퍼로 제작된 워터프루프북은 제조 단계에서 물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수질 오염이 없고 나무 종이에 비해 온실가스 발생량이 아주 적은 친환경책이라고 하는군요.
부끄럽지만 몇해 전 워터프루프북 시리즈 첫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 귀로 흘렸던 것을 고백합니다. 지금도 책 끝을 접거나 밑줄을 그을라치면 손이 떨리는 저 같은 부류의 사람에게 "해변가, 수영장, 계곡, 욕조 등 물과 습기에 구애 없이 마음껏 즐겨 보세요!"라는 홍보 문구는 전혀 와닿지가 않았거든요. 분명 그런 장소에서도 책을 읽곤 하지만 '마음껏' 즐기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어요. 당연히 책은 물에 젖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읽어야 하는 거였으니까요. 막상 책을 손에 쥐고 나니 그런 편견은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영화든 책이든 같은 걸 여러 번 보는 편이 아니지만 작고 예쁘고 보들보들하고 물에 젖지도 않고 냄새마저 새로운 이 책은 자꾸 보게 됩니다. 펼칠 때마다 새롭게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도 반갑고요. 또 다른 워터프루프북 '밤의 승리'(이디스 워튼, 민음사, 2019)도 사두었는데 아무래도 이 책은 다음 휴가 때 읽어야겠습니다.
꿈틀책방은 경기 김포시 북변동에 있는 작은 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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