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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를 닮은 단아한 기품…조선 백자가 한자리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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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 자기로 만든 달이 떴다. 사방이 캄캄한 1층 전시장에 들어서면 조선 백자 42점이 허공에 걸린 듯, 조명 아래서 조용히 빛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앞에 놓인 청화백자 ‘백자청화 매죽문 호’는 별다른 설명이나 장치 없이도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조선 초기(15세기)에 제작됐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당당한 형태와 화려한 그림 장식을 자랑하는 이 작품은 국보로 지정돼 있다. 조선 백자의 처음과 끝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전시 ‘조선의 백자, 군자지향’이 5월 28일까지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조선 백자만을 다룬 전시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전시품의 규모가 방대하다. 간송미술관, 호림박물관 등 국내 8개 기관, 도쿄국립박물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등 일본 6개 기관에서 빌려온 백자 185점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전시품의 수준도 최고다. 한국의 국가지정문화재만 31점이다. 국보 21점 중 10점, 보물 42점 중 21점이다. 전시는 총 4부로 구성됐다. 지상에는 △종류를 불문하고 ‘슈퍼스타’들을 한데 모은 블랙박스가 마련됐고, 지하에는 △청화백자 △철화·동화백자 △순백자 전시공간을 차례로 돌아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조선 백자를 집대성한 전시다.
조선인의 백자 사랑은 유명하다. 백자는 백토로 만든 형태에 투명한 유약을 입혀 고온의 불에 구워낸 자기를 말한다. 자기(1,300∼1,350℃)는 토기(600℃)나 도기(900∼1,000℃), 석기(1,100℃ 이상)보다 굽는 온도가 높고 조직이 치밀한 한편, 포근한 순백색을 띠어 미적으로도 뛰어나다.
과거에는 자기를 만들어 낸 국가가 중국과 베트남, 한국 정도였다.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이전까지 사랑받던 청자와 분청사기 등은 점차 생명력을 잃었다. 청자는 13세기 몽골의 침입 이후로 퇴보하기 시작했고, 분청사기는 조선 중기, 늦어도 17세기부터는 제작이 중단됐다.
조선에서는 조정에서 백자를 주도적으로 생산했다. 전승창 아모레퍼시픽미술관 고문의 ‘왕실의 권위와 상징, 조선 전기 백자’에 따르면, 조선 왕실은 백자를 어기(御器)로 채택하는 한편, 궁중의 음식을 관할하던 사옹원에 백자의 제작을 맡겼다. 그 결과 국가가 관장하는 가마인 ‘관요’가 설치됐다. 15세기부터 경기 광주시 일대에 가마들이 설치됐고 지금도 가마터 수백 곳이 남아 있다. 전북 남원시, 경북 고령군 등지에서도 백자를 제작했지만 백자 문화와 생산의 중심은 관요였다. 조정은 1466년부터 백성들의 백자 사용을 금지했지만 조선인들의 백자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사대부 등 지배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1528년에 쓰여진 '중종실록'에는 함경도 등 조선 최북단 지방에서도 광주의 백자를 구해서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자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았던 청화백자를 대거 만날 수 있다. 코발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푸른색 안료로 그림을 그린 청화백자 때문에 밀무역이 성행할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조선은 중국에서 코발트를 수입했는데, 중국 역시 페르시아에서 코발트 대부분을 수입하던 실정이었기에 청화백자는 귀하고 비쌌다. 조정은 1469년 반포된 '경국대전 형전'에서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자는 장 팔십에 처한다’고 엄포를 놨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백성들은 중국에서 청화백자를 몰래 들여와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청화백자가 지하 전시장 초입에 놓인 ‘백자청화 운룡문 호’다. 18세기에 제작된 이 작품은 흰 바탕에 푸른 용이 새겨져 있다. 용이 그려진 항아리 중 현존하는 것으로 가장 큰 것으로 높이가 61.9㎝에 이른다. 이처럼 커다란 항아리에 용을 그려 장식한 것을 ‘용준’이라고 부르는데 용 항아리는 궁중의 크고 작은 행사 때 술을 담거나 비단으로 만든 꽃인 채화를 꽂았던 의례용 용기다. 이 밖에 상상의 꽃인 보상화를 빼곡하게 채워 놓은 화려한 잔받침인 ‘백자청화 보상화당초문 잔받침’(15세기)도 눈에 띈다. 18세기 말~19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청화 송하호작문 호’에는 민화의 대표적 소재인 까치와 호랑이가 새겨져 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민화적 문양이 나타났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검붉은 색으로 시원하게 그림을 그려 넣은 철화·동화백자들도 만날 수 있다. 철화·동화백자는 각각 철과 동을 안료로 사용해 제작됐는데, 이는 조선 중기 이후 힘겨운 역사와 관련이 있다. 16세기부터 조선은 일본, 중국과 전쟁을 연거푸 치렀고, 17세기 후반에는 경신대기근까지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도 관요와 지방에서는 꾸준히 백자를 생산했다. 그러나 코발트 등 안료 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그 결과 철화·동화백자가 유행하게 됐다. 관요에서 만들어진 ‘백자철화 운룡문 호’(17세기)는 똑같이 용을 그린 항아리지만 앞서 만났던 ‘백자청화 운룡문 호’와는 다른 멋을 자랑한다. 문양은 동일하지만 철 안료 특유의 강렬함과 색 변화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에서 제작된 백자들은 문양이 어린아이처럼 자유로워 중앙의 세련된 백자들과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지막 전시공간에서는 우윳빛 빛깔을 뽐내는 순백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순백자들은 그림 장식은 전혀 없지만 아름다운 형태가 자랑거리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만들어졌지만 동시에 단단한 형태를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양각으로 표면 일부를 도드라지게 만들거나 표면에 구멍을 내 모양을 만들어낸 순백자들이 볼 만하다. 영조 30년(1754) 청화백자의 사적 사용이 또다시 금지되는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양각 백자가 제작됐다는 해석도 있다. 몸체를 깎아 연꽃잎과 잎맥까지 표현한 ‘백자양각 연판문 병’(18세기 후반)은 이번 전시에서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준광 리움미술관 책임연구원은 “'논어'에는 외형적 형식과 내적인 본질이 서로 잘 어울린 뒤에야 군자라고 할 만하다는 말이 있다”면서 “우리 도자기를 보면 왕실의 품격과 위엄을 보여주는 최고급 도자에서 지방 서민들이 쓰는 질박한 도자까지 그에 걸맞은 안료와 기법으로 장식한다. 이게 우리 조선 백자를 관통하는 핵심적 본질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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