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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와 함께하여 그를 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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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화면으로 보는 만화가 일상인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 사이로 책장을 끼워가며 읽는 만화책만의 매력을 잃을 수 없지요. 웹툰 '술꾼도시처녀들', 오리지널 출판만화 '거짓말들'의 만화가 미깡이 <한국일보>를 통해 감동과 위로를 전하는 만화책을 소개합니다.
'요나단의 목소리'가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 이런 일들이 있었다. 2018년 여름, 정해나 작가는 독립 플랫폼 딜리헙에 비정기 연재를 시작했다. 흑백 만화였다. 묵직하면서 섬세하고, 격정적이면서도 담담한 이야기에 삽시간에 매료된 독자들이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3년의 연재를 마칠 즈음 수채화 채색을 더해 단행본 출간 펀딩을 했고, 신인 작가의 이 첫 번째 작품은 펀딩 목표액의 1,740%를 달성하며 그해 최고의 화제작이 됐다. 그러고도 입소문은 멈출 줄 몰랐다. 원래 독자란 놀랍도록 좋은 작품을 만나면 어떻게든 소문을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친구의 열띤 영업에 넘어가 책을 읽게 된 나도 군말 없이 입소문 대열에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은 이렇다. 기독교 계열의 기숙 고등학교에 입학한 의영은 채플 시간에 눈에 띄게 노래를 잘하는 성가대원 선우와 룸메이트가 된다. mp3 플레이어 교환을 통해 의영은 찬송가만 듣던 선우에게 "세상 음악"을 알려 주고, 무신론자인 의영은 처음 듣는 "안 세상 음악"에 매료되기도 하면서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선우는 학교 성적이 좋고 성실한 모범생이지만 가끔 냉소적으로 굴고 거짓말을 잘하고 우울증 약을 먹는다. 천성이 밝고 단순하고 숨길 게 별로 없는 의영은 뭔가를 계속 숨기고 있는 선우의 복잡하고 피곤한 세상에 계속 신경이 쓰인다.
선우가 원래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선우의 세상은 신에 대한 의심 없는 사랑으로 평온했었다. 열다섯 살의 어느 날,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두 친구 다윗과 주영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리고 불시에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선우는 사랑에 빠졌다. 경건해지는 사랑, 유치해지는 사랑, 그 사람의 이름만 봐도 웃음이 새어 나오는 사랑,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랑, 조마조마하고 안타까운 사랑, 너무 벅차오르다 못해 자신이 미워지는 사랑.
흔하디 흔한 첫사랑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맞지만 선우는 목사의 아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자신이 퀴어라는 걸 알게 된 10대 소년의 사랑은 이제 세상의 지축이 흔들리는 시련과 고통 앞에 놓이게 된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사랑, 맘껏 애도할 수도 없는 비통한 사랑, 그리고 끝내 그 뜻을 알 수 없는 신의 사랑. 신앙과 혐오가 어떻게 한자리에 있을 수 있는가. 어째서 사랑은, 신은, 이렇게까지 가혹한가. 사랑과 진실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있을 자리는 어디인가. 단 한 장면도 과잉이 없는 이 놀라운 작품은 독자들이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자극적이거나 상투적이거나 유치한 결말을 가뿐히 피하며 우리들의 질문에 조용하게 응답한다.
'요나단의 목소리'가 내게 오고 나서, 나는 타인의 "아이러니하고 피곤한 삶"을, “어렵고 이상한” 세상을 속단하지 않기로, 쉽게 포기하거나 외면하지도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사랑의 좌절로 모든 걸 내려놓고 싶을 때 우리를 구원하는 건 다시 한번 사랑. 아마 살아가는 동안 나는 선우 곁에 있던 의영을 자주 떠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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