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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의 만남…보태니컬 아트 개척한 여성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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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세밀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답이 있다. 미술사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도 및 페르시아 등지에서 상아나 유리, 금속 위에 그려진 ‘미니어처’ 미술을 생각할 것이다. 또는 얇은 붓이나 펜으로 사물이나 인물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그린 바로크 시대 정물화나 현대의 극사실주의 그림을 떠올릴 수도 있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양육자, 또는 출판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사실적인 일러스트로 꾸민 식물도감, 곤충도감 같은 어린이 책이라고 답할 것이다. 이렇듯 세밀화는 하나로만 정의할 수 없지만, 현재 세밀화라는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는 분야는 출판물 쪽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태니컬 아트’, 포괄적으로 칭하자면 ‘과학 일러스트’라 불리는 그림들이다. 아이들이 보는 백과사전이나 의대생들이 보는 의학서적에 담긴 그림들이 미술과 무슨 관련인가 싶겠지만, 이 그림들의 시작점이자 출발은 미술사 1장 첫 페이지와 함께한다. 미술사 책의 첫 페이지는 고대 동굴 벽화의 그림이다. 동굴 벽에 그려진 소, 말 그림은 현대적 개념의 과학 일러스트, 즉 어떤 목적을 가진 세밀화다.
오늘날에도 많은 보태니컬 아트 및 과학 일러스트 분야의 전문가들은 손수 붓과 펜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기가 없던 시절이야 그렇다 쳐도, 이제는 근접 촬영도 가능하고 심지어 인공지능을 동원하면 더 세밀하고 정확하게 대상을 재현할 수 있는데 “왜 아직도 그림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첫째, 동식물과 곤충의 서식 환경에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대상을 방해하거나 해치지 않고 이들을 재현하는 선한 작업이다. 둘째, 창작자의 선택에 따라 특정 주제를 부각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확인한 단편적인 사실을 창의적 스토리텔링으로의 재구성이 가능하다. 셋째, 사진보다 그림이 교육적 효과가 높다. 아이들은 사진이 가득한 잡지보다 그림이 가득한 책에 먼저 눈길을 준다. 그림은 사진보다 기억 효율이 더 높다. 그림으로 된 백과사전이 아이들에게 좋은 이유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밀화는 과학과 예술의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컴퓨터 기술로 배경을 지우고 특정 대상을 부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력이 구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곤충과 꽃을 바라보는 작가적 시선이다. 객관적 사실을 목적으로 하는 과학, 그리고 주관적 상상을 지향하는 예술, 이 양쪽을 이어주는 융합적 사고는 인공지능 시대를 앞둔 예술가들에게 필수적이다. 이 글은 이러한 융합을 보여준 예술가에 대한, 그것도 300년 전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의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화폐 속 인물 중 여성은 15%에 불과하다. 당시 이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예전 독일 500마르크 지폐의 주인공도 여성이었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특히 유럽에서 존경받는 생물학자이자 화가였던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스위스의 판화가이자 출판업자였고, 마리아는 결혼 이후에도 아버지 메리안의 이름을 사용했을 정도로 예술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가문 출신이었다. 3세 무렵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녀의 어머니는 정물화가였던 야콥 메릴과 재혼한다. 그녀의 새아버지는 친부의 재능을 물려받은 어린 마리아의 재주를 눈여겨보고 자신의 공방에서 매일 그림을 가르쳤다. 13세의 마리아는 양잠소에서 누에 기르는 일을 했는데 이때부터 ‘곤충 덕후’가 되었다. 마리아는 애벌레가 탈피하여 나방이 되는 과정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애벌레들을 수집, 사육, 관찰하면서 누에의 섭식, 습성, 생애를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은 나비가 죽은 동물 사체에서 태어난다고 여길 때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학 협회인 린네학회의 2017년 강연에서 미술연구자 케이트 허드 박사는 “네덜란드의 얀 슈밤메르담은 1662년에,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레디는 1668년에 애벌래 변태를 처음 확인했는데, 이보다 더 앞선 1660년에 13세 소녀 마리아가 가장 먼저 누에의 변태를 확인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665년 18세의 마리아는 새아버지의 제자였던 화가 요한 안드레아 그라프와 결혼하여 남편의 공방 일을 돌보며 곤충과 식물 채집에 몰두했다. 그러나 남편 요한은 술을 좋아하는 방탕한 사람이었다. 실질적인 생계는 아내 마리아의 몫이었다. 딸들을 키우며, 생계를 위해 부유층 자제들의 미술교사로 일하는 와중에도 1675년 28세 나이에 첫 식물도감 채색동판 화집을, 32세에는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이상한 꽃 음식'을 출간했다. 36세에는 앞선 책의 후속편을 공개하면서 당시 생물학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38세에는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 남편 곁을 떠나 어머니와 두 딸을 데리고 네덜란드 발타 섬으로 이주하며 별거를 시작했다. 당시 발타 성 영주가 남아메리카 식민지 수리남의 총독으로 재임한 적이 있는데, 그때 가져온 열대 곤충 표본을 마리아가 보게 되면서 열대 곤충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692년 45세의 마리아는 무능하고 방탕했던 남편과 마침내 이혼한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 이혼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 접어들면서 결혼의 권한이 교회에서 국가로 이양되었고 조금씩 이혼이 허용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남편 요한이 이혼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혼을 원했던 것은 마리아였다. 합의 이혼이 가능해진 20세기 초 이전까지는 유자녀 부부의 이혼은 주로 여성의 귀책 사유를 근거로 처리했다. 이제 곧 손주를 볼 할머니 신분이 된 마리아는 이혼이 두렵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제 그녀는 본격적인 열대 생태계 연구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희망에 찼을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작품 대부분을 처분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를 설득하여 마침내 연구자의 자격으로 수리남으로 가게 된다. 얼마 전 화제를 모았던 하정우, 황정민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수리남'의 덥고 습한 그 수리남이다. 마리아는 오로지 연구를 목적으로 수개월의 항해 길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다.
1699년 수리남에 도착한 52세의 마리아는 열대 밀림의 곤충, 식물의 표본을 모으며 기록했다. 그러면서도 네덜란드 농장주의 원주민 박해를 비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5년을 머물기로 했던 계획과 달리 말라리아에 걸리면서 2년 만에 네덜란드로 귀국해야 했다. 마리아는 1705년 '수리남 곤충들의 변태'를 출간했다. 생물학자들이라면 금과옥조로 여기는 책이다. 마리아의 연구는 훗날 동식물 종 분류의 기초가 되었다. 마리아는 역사적 저서 '수리남 곤충들의 변태'를 남긴 지 10년 후인 1715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만다. 이로 인한 마비로 일을 하지 못했고 2년 후인 1717년 숨을 거두었다. 사망신고서에는 마리아가 '극빈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안타까운 말년의 초라함은 이후 그의 책들이 화려하게 채워 주었다.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저서들은 18세기부터 유럽 도서관들의 필수 소장본이 되었고, 전 세계 보태니컬 아티스트, 과학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가장 존경하는 선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1908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을 요구했던 시위를 기념하며 1977년 유엔에서 공식 지정한 날이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여성의 인권과 권리에 대한 많은 개선과 발전이 있었다. 전 세계 화폐에 등장하는 여성이 아직은 15%에 불과하지만, 시대의 편견과 역경을 넘어서는 노력으로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이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가능했던 결과다. 그 15%에 불과한 여성 중 거의 절반이 예술가의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화폐 속 유일한 여성인 신사임당 역시 예술가의 자격으로 새겨졌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신사임당을 ‘현모양처’ 또는 ‘훌륭한 어머니’로 떠올리겠지만,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과 마찬가지로 신사임당 역시 뛰어난 보태니컬 아티스트였다. 다만,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초충도'는 과학적 분석 대신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남겨졌다는 차이는 있다. 여성의 권리가 비교적 넉넉했고 결혼 후에도 주로 친정에서 살았던 조선 전기 시대의 신사임당과는 달리, 신사임당보다 60년 후에 태어났던 허난설헌은 여자가 시댁에서 생활하는 ‘친영제(親迎制)’의 1세대였다. 안타깝게도 남편과 시부모는 재능이 뛰어났던 허난설헌을 아껴주지 않았고, 역병으로 어린 남매까지 연달아 장례를 치르는 질곡의 삶을 살았다. 27세의 나이로 죽기 직전, 자신의 모든 시를 불태워 없애라는 유언이 없었다면 수백 년 이어진 허난설헌에 대한 표절 논란도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다. 과거 역사 속 위대했던 여성에 대한 연구가 어려운 것은 남겨진 기록과 흔적이 너무나 적기 때문이다. 별처럼 수많았던 여성들 중에 우리가 그럼에도 추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여성은 자신의 삶을 녹여낸 창작 작품을 남긴 예술인들이었다. ‘꽃과 같은 여인’이 되기보다는 직접 꽃을 그리는 적극적인 삶의 의지가 역사를 바꾸었고, 앞으로도 바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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