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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애의 등장이 뜻하는 세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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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동사 중 '어노인트(anoint)'라는 단어가 있다. 서양의 종교의식에서 신자의 몸에 성유(聖油)를 바르는 행위를 의미한다. 구약시대에 기름이 가진 치유와 보존 능력 때문에 몸에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곧 성령을 받는 것을 상징했다. 게다가 제정일치 사회에서 누군가에게 기름을 바르는 행동은 다름 아닌 왕을 책봉하거나 예언자를 선포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어원 때문에 국제정치학자들에게 '어노인트'라는 단어는 권위주의 정권의 지도자가 자신의 권력 승계를 위해 후계자를 내세우는 상황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따라서 김정은의 딸 김주애에 대한 수식어가 '사랑'에서 '존귀'로, 다시 '사랑'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 후계자의 '내정'이냐 '지명'이냐 하는 논쟁도 그렇다. 주애의 후계자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김정은이 '제일로 사랑하시는'이라고 기름을 발라 국가행사에 끌어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권력 서클에서 김정은으로부터 '어노인티드'된 인물은 이제 단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주의 체제의 엘리트들은 지도자에 대한 자신들의 절대적 충성을 보여줄 주변 인물을 찾게 마련이다. 1인 독재 체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최고지도자와의 수시 접촉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김정은의 손가락이 김주애를 가리키는 순간, 주석단 위아래의 모든 이가 미켈란젤로의 걸작 '천지창조'에서 아담을 향해 내뻗어진 손가락을 보았을 것이다. 독재 체제의 권력 세습에 필요한 것은 재벌 세습에서처럼 자녀들의 소유 지분 구조가 아니다. 오직 중요한 것은 절대자의 창조 의지이다.
김주애가 김정은의 후계자로 내정되었다고 해서 노동당 총비서나 국무위원장 지위를 승계한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독재국가 권력정치의 역사에 비춰보면 권력 세습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변수들이 있다. 후계자의 권력 의지, 지배 엘리트 그룹의 복종 여부, 주변 국가의 승인과 같은 요소들이다. 김주애가 오빠와 동생의 피를 부를 처절한 권력 투쟁을 이겨낼 만큼 흔들림 없는 권력 의지를 갖고 있을지, 빨치산 혁명세대의 자녀들이 김정은의 어린 딸에 대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충성 맹약에 나설지 등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북한의 경제적 생명줄을 쥐고 있는 중국의 입장 또한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첫째, 얼굴 젖살이 채 안 빠진 소녀는 아버지가 김정은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북한의 국가 통치 영역에서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추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권력 릴레이가 4대 세습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이미 '유력' 단계로 들어섰으며, 어느 시점엔가 '확실'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인민의 바람도, 공화제의 이상도 저버리고 군주제 국가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3가지 사실은 따지고 보면 하나의 현상을 우상화, 권력세습, 반(反)공화정이라는 서로 다른 시각에서 설명한 것에 불과하다. 3가지 설명을 관통하는 지점은 어디에 있는가. 북한에서 통치시스템이 이미 김씨 일가의 가산(家産)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김주애의 등장은 가산제 국가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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