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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없이 산 1년 반... 카트리나 키즈는 아직도 악몽 속을 헤맨다

입력
2023.03.14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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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키즈, 마음 재난 보고서 ④-2]
아이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기는 대재난

편집자주

“아이들은 모두 자란다. 한 사람만 빼고.” 소설 ‘피터팬’ 첫 문장입니다. 어쩌면 한국엔 여느 세대처럼 제때 자라지 못한 ‘피터팬 세대’ 가 출현할지 모릅니다. 길었던 거리두기, 비대면 수업 탓에 정서·사회적 발달이 더뎌진 ‘코로나 키즈’ 말입니다. 마스크와 스마트폰에 갇혀, 아이들은 ‘제대로 클 기회’를 놓쳤습니다. 이 상실을 방치하면, 소중한 미래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 그 회복에 필요한 어른들의 노력을 함께 짚어 봅니다.


2005년 9월 1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13세 소녀 애니카 윌리엄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2005년 9월 1일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13세 소녀 애니카 윌리엄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카트리나에 대해 말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간 아무도 저에게 괜찮은지 묻지 않았거든요.

(12세 때 카트리나를 겪은 미에샤 윌리엄스)


작년 8월 HBO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영화 카트리나 베이비스(Katrina Babies). 미에샤 윌리엄스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허리케인이 미국 뉴올리언스에 상륙했던 2005년 8월, 미에샤는 열두 살 소녀였다. 그 후 17년(영화 개봉 시점 기준)이 지났지만 미에샤는 당시 차가웠던 공기, 거센 바람소리, 거리에 널부러져 있던 시신들,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하나하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미에샤는 가슴 한 켠에 그 기억을 애써 접어두고 어른이 됐지만, 그때의 장면을 도저히 몰아내기가 어렵다.

미에샤의 머릿속에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가 각인됐고, 카트리나는 극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허리케인이 남긴 사망자 규모와 재산 피해만 언급했을 뿐,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아픔에는 무심했다. 특히 당시 어린 나이에 고스란히 충격을 감내해야 했던 젊은이들의 정신 건강 문제는 조명받지 못했다.

사회적 재난인 코로나 팬데믹 3년을 겪으며 아이들이 정서, 학력, 발달 등 다양한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 아이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지금의 정신적 충격이나 각종 발달 장애들이 장기간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카트리나 키즈의 트라우마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다음날인 2005년 8월 30일 미국 뉴올리언스 시가지의 모습. 당시 제방 붕괴로 인해 도시의 80%가 물에 잠겼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강타한 다음날인 2005년 8월 30일 미국 뉴올리언스 시가지의 모습. 당시 제방 붕괴로 인해 도시의 80%가 물에 잠겼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자연재해, 전쟁, 역병 등 다양한 대재난을 어린 시절에 겪은 세대가 어른이 되어서도 당시의 심리적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는 '집단 트라우마' 현상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2005년 8월 29일 미국 남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최저기압 902hPa)가 바로 그런 상흔을 남겼다. 카트리나 상륙 당시 제방 붕괴 피해를 입은 도시 뉴올리언스는 80%가량이 침수됐다. 1,392명이 사망하고 약 1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연히 학교도 물에 잠겼고 9월 새 학기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1년 반 뒤에 학교로 돌아온 아이들에게선 학력 저하와 심리적 불안정 현상이 뚜렷이 관찰됐다고 한다. 미국 공교육혁신센터 창립자 폴 힐은 "아이들 수준이 두 학년 정도 낮아져 있었고, 특히 수학에서 학습 부진 현상이 두드러졌다"고 설명했다. 케이티 매클로플린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는 "카트리나 이전 뉴올리언스에서 '심각한 정서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은 4.2%였지만, 18개월 후엔 15.1%, 36개월 후엔 11.5%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미국 사회는 당시 심리적 불안 상태, 각종 발달상의 어려움, 장기간 공교육 중단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을 '카트리나 키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카트리나는 아직도 현재진행형

미국 루이지애나 주방위군 병사가 2005년 8월 31일 뉴올리언스 슈퍼돔 앞에서 보트를 타고 도착한 이재민 아기를 안아들고 있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미국 루이지애나 주방위군 병사가 2005년 8월 31일 뉴올리언스 슈퍼돔 앞에서 보트를 타고 도착한 이재민 아기를 안아들고 있다. 뉴올리언스=AP 연합뉴스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스를 덮친 지 18년이 흘렀지만, 카트리나 키즈에게 허리케인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심리상담이나 교육 회복 프로그램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미에샤와 같은 저소득 흑인 계층은 소외된 경우가 많았다. 카트리나 트라우마를 연구해온 데니스 셔빙턴 툴레인 의대 정신과 임상교수는 "의료시설을 포함해 지역 인프라가 모두 파괴되면서 아이들 지원에 어려움이 있었고, 부족한 의료 자원으로 인해 지원 순서나 우선순위도 불평등했다"고 지적했다.

의료 지원 부족은 아이들의 비행과 폭력성 증가로 이어졌다. 13세에 허리케인을 겪은 '카트리나 베이비스' 감독 에드워드 버클스는 허리케인 이후 변한 친구들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했다. 그는 "갱단에 들어가는 아이들이 많아졌고, 친한 친구는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고 회상했다. 댈러스나 휴스턴으로 전학 간 아이들은 '카트리나 난민'이라고 낙인찍혔고, 새 학교 아이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일이 뉴스에 자주 등장했다.

카트리나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은 영향은 아직도 뉴올리언스 사회 전반에 남아있다. 버클스는 2015년 뉴올리언스의 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는 아이들 이야기를 막상 들어보면 카트리나 트라우마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셔빙턴 교수는 "뉴올리언스 젊은이들이 폭력성을 보이지만, 이들에게 필요한 건 엄벌이 아닌 심리적 지원"이라고 진단했다.

대지진에서도 장기 PTSD 경험

2004년 말 남아시아 대지진 및 쓰나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 근교의 어린이들이 호주군 헬기가 투하하는 구호물자를 잡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람파야(인도네시아)=AP 연합뉴스

2004년 말 남아시아 대지진 및 쓰나미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인도네시아 반다 아체 근교의 어린이들이 호주군 헬기가 투하하는 구호물자를 잡기 위해 손을 뻗고 있다. 람파야(인도네시아)=AP 연합뉴스

다른 자연재해에서도 아동의 집단 트라우마 현상이 관찰됐다. 태국은 2004년 12월 발생한 남아시아 대지진에서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연구했다. 학생 1,615명 중 참사 1달 반 뒤 57.4%, 1년 뒤 31.6%가 PTSD 반응을 보였다. 해당 학생들 모두 정서 지원을 받았음에도 이들 중 2.7%는 5년 후에도 PTSD를 겪고 있었다고 한다.

1988년 약 4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르메니아 스피타크 대지진의 경우, 사건 발생 후 25년 시점까지 피해 아동 관찰이 이뤄졌다. 아르멘 고엔지안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정신과 연구교수 팀이 당시 청소년이었던 142명을 추적관찰한 결과, 참사 1년 반 뒤엔 44.3%가 PTSD 증상을 보였고, 25년 뒤에도 20.4%가 PTSD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엔지안 교수는 "재난 후 PTSD 증상은 수십 년 간 지속될 수 있다"며 "트라우마 치료와 회복 모니터링은 재건의 필수 요소"라고 분석했다.

미국은 이미 '코로나 키즈' 피해 분석 착수

코로나 키즈, 마음 재난 보고서

코로나 키즈, 마음 재난 보고서

외국에선 이미 코로나로 인해 정서·발달상의 어려움을 경험한 '코로나 키즈'에 대한 분석에 착수했다. 카트리나를 겪은 미국에선 2020년 코로나 초기부터 등교 중지와 관련해 뉴올리언스 사례를 언급하며 대처했다. 학력 부분에선 벌써 비교가 이뤄졌는데, 코로나 팬데믹이 허리케인 카트리나보다 수학 점수를 더 떨어뜨렸다는 결과가 나왔다. 어린이들의 학업 평가 관련 비영리조직인 노스웨스트 평가협회(NWEA) 소속 메간 커필드 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2021년 미국 3~8학년 540만 명의 수학 점수는 2019년에 비해 3.3~4.5점 하락했다. 카트리나 이후 뉴올리언스 학생들의 수학 점수 하락폭(1.39점)보다 크다.

국제기구는 아동 심리지원에 집중하고 있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사는 13세 소년 잭은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에 30분씩 원격으로 심리상담을 받는다. 2020년 호주 산불 당시 집이 거의 탈 뻔해 소방차만 보면 놀라는 트라우마를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팬데믹으로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친구들도 만나지 못하면서 우울감이 심해졌다. 유니세프는 "어렸을 때 겪은 트라우마는 단기적으로 불안, 불면, 집중력 저하 등의 증상을 보이고, 치료하지 않으면 성인이 돼서도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저학력, 저소득 계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전문가들도 속히 코로나 키즈가 입은 피해를 돌아보는 연구에 착수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김현수 일산명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코로나 시기 겪은 문제를 사회가 함께 지지해 주려면 추적관찰이 필요하다"며 "이런 노력이 이뤄지지 않으면 후유증과 피해가 개인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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