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 책 파는 걸 포기했다

입력
2023.03.01 22:00
27면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편성준 작가 제공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편성준 작가 제공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들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절엔 주저하지 않고 밑줄을 긋는 편이다. 밑줄만 긋는 게 아니라 그 옆이나 밑 빈 공간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깨알같이 적어 놓기도 한다. 일단 나의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다. 인간의 기억력이란 게 참으로 보잘것없어서 읽은 걸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감탄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던 구절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 잊어버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밑줄을 긋거나 책 귀퉁이 한쪽을 접어 도그지어(Dog's ear)를 해놓으면 다시 펼칠 때마다 그때의 느낌까지 거의 다 기억이 나니 독후감이나 독중감 쓰기를 즐기는 나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책 표지를 비닐이나 포장지로 싸고 낙서도 하지 않는 게 너무 당연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다 읽고 나면 다른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도 있다'는 배려의 마음에 책을 더 소중히 다루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젠 책이나 영화가 없어서 못 읽고 못 보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넘쳐나서 문제다. 당장 집 안의 서재를 둘러보라. 읽지 않거나 뜯지도 않은 책이나 영화, 음악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 우리에게 모자라는 건 즐길 콘텐츠가 아니라 향유할 시간이다.

나는 스마트폰과 유튜브 등 각종 볼거리로 넘쳐나는 환경에서도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일종의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행운도 성의가 부족하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 버린다. 좋은 책은 처음보다 다시 읽었을 때 더 큰 도움과 깨달음을 주기 마련인데 두 번째로 책장을 열었을 때 내가 친 밑줄이나 도그지어가 보이면 그 감흥과 더 빨리 재회할 수 있다.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편성준 작가 제공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 편성준 작가 제공

얼마 전 소설 잘 쓰기로 소문난 어느 작가의 책을 구입해 '밑줄을 긋거나 도그지어를 전혀 하지 않은 채 끝까지 읽기'에 도전해 보았다. 왜 그런 도전을 결심했느냐고 누가 물으면 '나도 한번 다 읽은 책을 헌책방에 팔아보고 싶어서'라는 대답도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깨끗하게 그 책을 다 읽고 나자 뭔가 가슴속이 허전했다. 1만6,000원 정도 주고 구입한 그 책을 읽자마자 헌책방에 팔아도 1,000원 정도밖에 못 받는다는 걸 알고 나니 더 그랬던 것 같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거나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면 어쩔 수 없이 상처가 남는다. 그 사람들이 내 가슴에 줄을 긋고 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책에는 아무리 밑줄을 그어도 상처가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아무리 다정해도 한계가 있다. 밑줄을 긋는 건 언젠가 다시 펴보겠다는 나와의 약속인데 빌린 책에는 함부로 그런 언약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지금 내 앞엔 밑줄을 긋고 도그지어를 많이 만들어서 지저분해진 책이 있다. 나는 혹시라도 지문이 묻을까 봐 장갑을 끼고 애지중지한 책보다는(한때의 시인 장정일은 정말 그랬다고 한다) 중철제본으로 완강히 버티는 책등을 힘껏 눌러 펴고 귀퉁이를 접거나 볼펜으로 밑줄까지 친 헌책이 더 좋다. 그 책에는 책과 나만 아는 유치한 비밀들이 가득하다. 게다가 내가 긋는 밑줄은 아프지 않다. 그저 내가 필요할 때마다 독후감 쓰는 걸 돕거나 가난해진 마음을 다시 채워줄 양식이 되어줄 뿐이다. 이제 헌책방에 책 파는 건 포기했다. 그러니 앞으로 내게 오는 책들은 각오하기 바란다. 그대는 헌책방으로 갈 기회를 박탈당했으니 순순히 내 밑줄을 받을지어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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