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속죄 페미니즘'을 넘어서

입력
2023.03.04 04:30
12면

<108>남성과 페미니즘, 불화와 속죄를 넘어 나아갈 수 있을까?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2030 남성으로 구성된 모임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지난해 2월 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서 열린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에서 여성혐오 중단을 촉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2030 남성으로 구성된 모임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지난해 2월 9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서 열린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에서 여성혐오 중단을 촉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얘 '남페미'래요!"

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을 하다 보면 남자 청소년 사이에서 서로를 '남페미(남성 페미니스트)'라고 놀리며 키득거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럴 때면 약간은 눈치 없는 척 끼어들어 "엥? 나도 페미니스트인데? 그게 왜?"라고 되물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케케묵은 오해를 풀곤 한다. 하나 어렵게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개선되어도 '남페미'라는 명칭을 향한 낙인은 여전할 때가 많다. 많은 이들에게 '남페미'는 여성에게 잘 보이려고 절절매거나 속이려 드는 사람 정도로 여겨진다. 심지어 나도 한동안 누군가 '남페미'로 소개할 때면 흠칫하여 애써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로 정정하곤 했다. 사회운동이 변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오해를 사거나 반동을 겪는 일은 흔하지만, 한편으로 '남페미'라는 말에 얼굴 붉히거나 손사래 치는 일이 잦은 현실은 두고 이야기해 봄직하다. 다만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과 오해, 혐오는 성별을 뛰어넘어 다양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럼에도 굳이 여기에서 남성을 강조하여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것이 유난히 더 어렵고 힘들어서가 아니라, 다분히 글쓴이의 개인적인 관심 주제이자 나아가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드문 영역 중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대남’으로 이야기될 수 없는 다양한 남성 청년

2015년 즈음,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라 부르는 일종의 인식 혁명이 일어났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 깊게 남아 있던 여성혐오와 성차별, 성폭력을 이야기했고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한걸음 한걸음 변화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 청년은 광장과 일상에서 페미니즘을 주도하는 변화의 주축이었다. 반면 많은 남성 청년에게 이러한 변화는 낯설고 어려운 일이었다. 다르게 놓인 삶의 지평에서 청년세대의 성별 간 인식 격차는 나날이 커졌고 이른바 '이대남'이라는 명칭 아래, 남성 청년은 반페미니즘을 견인하는 단일한 세대군으로 조명됐다. 나를 포함한 많은 남성 청년이 페미니즘에 무감했던 이유 중 하나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다. 하나 한 세대를 단일한 특성을 가진 존재로 단순하게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실제로 남성 청년이 놓인 지평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2020년 발표된 최종숙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선임연구원의 논문에 따르면 '남성의 육아 수용'과 '여성 직장상사 수용', '여성의 주도'와 같은 지점에서 20대 남성의 성평등 의식은 30대 여성보다 높게 나왔으며, 2019년 한겨레의 젠더 미디어 '슬랩'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맨스플레인을 하지 말아야 한다', '스킨십이나 섹스를 하는 중 언제든 파트너의 의사에 따라 행위를 중단하는 게 당연하다' 같은 항목에 청년 남성 또한 각각 71.3%, 85.4%가 동의를 표하는 등 이들에게도 페미니즘이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나아가 그렇게 한 집단을 묶어서 이야기하는 것이 타자화를 통한 조롱과 책임 회피 외에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그보다는 더 나은 고민과 이야기를 해야 한다.

페미니즘 실천에서 남성이 맞닥뜨리는 장벽

2030 남성들로 구성된 모임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지난해 2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서 열린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에서 여성혐오 중단을 촉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2030 남성들로 구성된 모임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지난해 2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중앙계단 앞에서 열린 '우리는 이대남이 아니란 말입니까 기자회견'에서 여성혐오 중단을 촉구하는 손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전반적으로 높아진 성평등 의식은 분명 수많은 남성 역시 공명하게 했다. 친구들과 무심코 나누던 농담에 자신도 모르게 어떤 혐오가 녹아 있지는 않나 성찰하게 했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자 미리 페미니즘 책을 읽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 페미니스트냐고 물으면 아니라며 손사래 치기 바빴다. 비단 페미니스트에 대한 혐오와 차별 어린 시선 때문만이 아니라, '내가 감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성인 내가 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내가 감히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나 역시 마찬가지로 행여나 페미니즘 관련 활동이라도 하고 온 날이면 밀려드는 과거의 기억에 죄책감과 씨름해야 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어서 꾸역꾸역 어떻게든 페미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장벽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도통 어떻게 활동해야 좋을지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주변 남성과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며 변화를 만들고 싶었으나 남성 친구들 사이에서 페미니즘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일종의 금기였다. 애써 이야기를 꺼내봐도 방탄유리처럼 금세 튕겨나가고 관계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소원해졌다. 그렇게 외로워하던 차, 용기 내어 페미니즘 모임을 새로 찾았으나 첫 모임에 모인 스무 명 남짓한 사람 중, 남성으로 보이는 이는 나 혼자뿐이었다. 어색함과 뻘쭘함, 그리고 나 때문에 분위기가 더 불편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져서 모임에 더는 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에서 만난 좋은 여성 페미니스트 동료들이 있었으나, 그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다보면 내가 가진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과 고민이 너무 하찮고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일상에서 경험하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공포와 성차별 경험을 나눌 때, 이야기 나눌 친구가 없어 외롭다거나 발화권력을 염려하는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배부른 투정에 불과해 보였다. 게다가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남성 페미니스트는 여성에 비해 더 많은 주목과 마이크를 얻게 된다는 것 역시 고민 지점이었다. 나의 발화권력이 다른 여성 페미니스트의 마이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불안은 나의 페미니즘 실천을 더 쪼그라들게 했다. 더 큰 문제는 이 고민이 비단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미니즘과 성정치를 이야기하는 남자들은 기대와 태도, 개인적 스타일과 대면적 상호 작용에 초점을 맞추지, 경제적 불평등이나 제도화된 가부장제 또는 정치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R.W. 코넬, '남성성/들', 2013


남성성에 대한 고찰로 저명한 학자 R.W. 코넬은 페미니즘을 접한 남성의 태도를 위와 같이 지적했다. 실로 '남함페' 활동을 하며 만난 많은 남성 페미니스트 역시 제도 개선이나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 활동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여성 활동가 뒤에서, 또는 일상에서 변화를 시도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비단 게을러서가 아닌 위와 같은 고민, 즉 남성의 발화권력과 페미니스트로서의 자격에 대한 염려의 연장으로 보였다. 이러한 성찰은 분명 의미 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 지으며 페미니즘 실천을 주저하게 만드는 한 요소였다. 우리는 이를 '속죄 페미니즘'의 한 모습이라고 불렀다.

'남페미' 유니콘과 속죄를 넘어서

쓰인 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속죄 페미니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페미니즘에 공감하고 실천하면서도 페미니즘을 여성만의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실천과 역할에 제약을 두고 활동이 축소되는 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태도를 비판하며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속죄 과정 자체가 마냥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러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며 습득한 성차별적 사고와 태도에 대한 성찰은 성별불문 모두에게 필요하다. 문제는 그것이 속죄에서 머물 때 발생한다. 현실의 차별과 폭력은 개개인의 말과 행동을 넘어, 사회구조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이를테면,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생각해 보자. 김지영이 겪는 문제가 남편 정대현 때문이었던가? 도리어 정대현은 아내 김지영이 겪는 문제에 공감하고 슬퍼하며 함께 눈물 흘리는 꽤 좋은 남편으로 나온다. 그럼에도 김지영이 겪는 많은 문제, 예컨대 경력중단의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 그것이 비단 공감하고 함께 슬퍼해주는 것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사회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발화권력과 자격을 염려하며 뒤에서 조신히 내조하겠다는 말이 페미니즘 실천 과정에서 겪는 고단함을 외면하기 위한 회피는 아닐까? 그렇게 도망치면 결국 이곳에는 외면할 수조차 없이 절박한 이들만 남게 되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의 젠더 권력구조와 남성의 위치성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다. 여성혐오와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답습했던 역사와 내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차별적인 인식을 반성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속죄가 변화를 위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속죄는 자기기만이나 허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이러한 배경 아래 드물게 등장한 '남페미'는 언론과 커뮤니티를 떠돌며 과도한 주목을 받았다가 실망과 함께 사라지기를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남페미'는 유니콘처럼 상상 속 동물이 되거나 조롱의 언어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포기하기엔 이르다. 최태섭은 책 '한국, 남자'에서 "새로운 주체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형성되는 사회적 과정에 개입하고 그 과정을 바꾸어 내는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지금의 소란은 실패의 방증이 아닌 남성의 변화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시행착오가 예정돼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비웃고 손가락질하겠지만, 그 과정 끝에는 결국 '남성'이라는 수식어가 불필요해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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