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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사회문화적이다" 지금은 사라진 외국인노동자 의원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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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비로 화장실에서 힘을 줄 때마다 실신하는 40대 태국인 남성이 있었다. 이삿짐 짐꾼으로 일하던 그는, 어느 날 현장에서 책장을 들어 올리다가 쓰러지고 마는데…"
신간 '연결된 고통'에 등장하는 환자들은 저마다 독특한 사연을 품고 있다. 후천적면역결핍증(HIV) 양성인 약혼자를 고국에 두고 자신도 양성 판정을 받은 가나 출신 청년, 고단한 삶을 술로 달래다가 타국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네팔인 가장. 피부색도, 식성도, 문화적 배경도, 체류 이유도 제각기 다른 이들은,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외국인노동자 전용의원(외노의원)을 찾은 환자들이다.
내과 전문의이자 의료인류학자인 저자는 2011년부터 3년간 외노의원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했다. 2017년에 폐원한 터라 이 책은 병원의 유일한 기록으로 남았다.
대개 현대 의학은 환자의 증상을 듣고 특정 장기와 질병의 문제로 좁혀 들어간다. 효율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런데 이곳에서 저자는 이런 관점으로는 도무지 진단을 내리기 어려운 방식으로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를 만난다. "어디가 아프냐"는 질문에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뻐근하고, 소화가 안 된다며 여덟아홉 가지 증상을 쏟아내는 조선족 환자에 대관절 어떤 처방을 내릴 수 있을까.
'진료실 내 의료'에 한계를 느껴 늦깎이로 서울대에서 인류학을 공부한 그는, 이들의 증상 표현이 그가 속한 문화와 사회와 역사의 층위 위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된다. 이주 노동자라는 불안한 신분, 같은 민족이라는 기대를 품고 왔지만 한국에서 맞닥뜨린 차별과 낙인, 문화대혁명 같은 중국 사회에서의 억압적 기억같은 것들이 신체 증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내게 오는 환자들의 질환에는 단지 진단명 하나로 압축되지 않는 서사가 있다"고 믿는 그는, 그래서 묻고 경청한다. 대기 중인 환자가 많아 간호사가 눈치를 줘도, 30분 넘게 듣고 고통에 아로새겨진 맥락을 더듬는다. 몸을 효율적 통제 아래에 두는 것을 우선시하고, 3분 진료가 횡행하며, 의료 쇼핑이 만연한 오늘날 의료 현장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다.
앞서 변비와 실신을 반복한 남성은 그래서 무엇이 문제였을까. 알고 보니 그는 심장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실신과 급사의 위험을 높인 건 그의 사회·문화적 처지였다. 맵고 짠 한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채소 섭취가 줄었고, 변비로 이어졌다. 불안한 처지인 그를 고용하는 곳은 이삿짐센터뿐이었다. 짐을 나르느라 수시로 배에 힘을 주며 앉았다 일어났다. '비대칭성 심실중격 비대'라는 짤막한 진단이 담지 못하는 질병의 서사란, 이토록 맥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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