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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우주선이 드러낸 '합리성'에 갇힌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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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과 로봇, 우주가 더는 멀지 않은 시대입니다. 다소 낯설지만 매혹적인 그 세계의 문을 열어 줄 SF 문학과 과학 서적을 소개합니다. SF 평론가로 다수의 저서를 집필해 온 심완선이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떠도는 별의 유령들'은 주인공 ‘애스터’가 어린아이의 발을 자르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는 동상에 걸렸다. 우주선 내에서도 ‘하층 데크’ 주민은 인공태양의 열기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 하층은 춥고, 물자가 부족하고, 의사도 충분치 않다. 아이는 한쪽 발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럭저럭 담담히 받아들인다. 그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소설 속 사회는 잘못하지 않은 이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이들은 자주 소지품과 신체와 자유와 존엄을 빼앗긴다. 선내의 사회는 이들에게 적대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소설은 거대한 우주선을 배경으로 삼는 ‘세대우주선’ SF에 속한다. 세대우주선은 말 그대로 사람이 세대를 거듭해 생활할 설비를 갖춘 우주선을 말한다. 우주에서는 보급이 불가능하므로 세대우주선은 내부의 자원만으로 자급자족해야 한다. 공기, 물, 에너지 등 한정된 자원을 소중히 순환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주선에서는 지구와 달리 전적으로 인간이 시스템을 운영한다. 만약 분배가 불공정하다면, 그것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의 탓이다. 아이가 겪은 하층의 추위는 자연적인 기후가 아니라, 에너지 배급제를 명령하는 자가 지정한 것이다. 작중의 사건들은 현실과 다르게 ‘어쩔 수 없’지 않다. 책임관계는 명확하다.
이렇듯 소설은 세대우주선 설정과 사회적 마이너리티의 서사를 긴밀하게 결합한다. 작중의 풍경은 과학적으로 엄밀하고 또 사회적으로 치밀하다. 이 덕분에 애스터가 느끼는 분노는 생생하고 묵직하게 다가온다. 애스터는 묵묵한 얼굴 아래 격렬한 감정을 품은 인물이다. 애스터에게 “조심스러운 뼈는 없”다. 뼈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분이다. 애스터의 연약한 구석은 진작에 짓밟혀 사라졌다. 폭행과 모욕과 고통이 애스터를 담금질한다.
오히려 애스터를 주저앉히는 것은 내면의 혼란이다. 애스터의 마이너리티는 인종과 계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애스터는 부모를 모르고, 성별을, 소속을, 정체를 모른다. 그래서 소설은 애스터의 어머니가 남긴 암호를 해독하는 이야기이면서, 애스터가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말을 찾는 과정이다. 재료가 복잡한 만큼 결말에서는 낯설고 독보적인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SF의 장점은 현실의 전제를 뒤엎는 능력이다. 의심하고 폭로하는 힘이다.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선명하게 드러내지만, 현실의 재현이 아니다. 비현실로 벼려진 이야기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심장을 찌른다. 가시화되지 않은 존재들, 질문들, 진실들을 전면으로 끌어내는 방식이다. 합리성의 시야 바깥을 서성이는 유령들은 오로지 비현실로만 이야기된다. '떠도는 별의 유령들'은 “수수께끼와 은유로” 말하는 유령들의 속삭임을 소설로 번역한다. 그리고 종내 우리의 합리성이 편견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애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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