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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된 갈라테아, 그 시대 여성의 마음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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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지중해의 키프로스 섬으로 밀려온 하얀 거품 속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가 태어났다. 아프로디테를 모욕한 죄로 섬의 여인들은 저주를 받아 성적으로 타락하고 문란해졌다. 음란해진 여인들을 혐오했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원하는 순결하고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들었다. 조각상에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입을 맞추고 어루만지면서 사랑을 고백하던 피그말리온의 염원과 기도가 아프로디테에게 닿았고 마침내 갈라테아는 살아있는 인간이 되어 피그말리온의 아내가 되었다. 이것이 로마 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기록한 피그말리온 신화의 내용이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1964년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이 사용한 말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또는 “간절히 원하면 실제로 이루어진다”는 긍정적 교육심리 효과를 뜻하는데, 최근에는 비판도 적지 않다. 긍정적 최면술도 가스라이팅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어떤 이는 로젠탈 교수처럼 긍정적으로 해석했고, 어떤 이는 문제가 있다며 비판하기도 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1913년)은 갈라테아의 입장에서 서술한 희곡이다. 하층민 여성 일라이자는 자신을 귀부인으로 만들어준 히긴즈 박사의 구애를 거절하고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그의 곁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해피엔딩을 원했고, 버나드 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과 영화 모두 결별 아닌 사랑의 완성으로 각색되었다. 이처럼 피그말리온 신화는 오랫동안 예술가의 작품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 해석되었다. 숱한 갈라테아 그림들이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의 아카데미 화파를 이끌었던 장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1890년)가 가장 대표적이다.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의 화가 장 레옹 제롬은 프랑스의 전통적인 아카데미 ‘에꼴 데 보자르’에서 상당한 입지를 구축한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였다. 사실적이고 전통적인 표현기법 연구에 충실했던 그는 당시 유행했던 인상주의 화풍을 매우 못마땅히 여겼다. 그는 엄하지만 성실했던 교수였고, 프랑스의 정재계 인사들과 가까이 지낼 정도로 당대에 명성을 누렸던 예술가였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제롬에 대한 평가는 후하지 않다. 제롬은 사진기의 등장에 감탄하며 더욱 사진과 같은 그림을 남기고자 했으나, 오히려 사진기가 해내지 못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더 높게 평가받는 편이다. 게다가 그가 터키와 중동 지방을 여행한 후 남겼던 작품들은 19세기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적 오리엔탈리즘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한 미술관은 장 레옹 제롬의 전시회를 열면서 “우리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며, 본전시는 그 어떤 제국주의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보도하기도 했다. 역사의 판단과 평가는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때 그 시절에는 통상적으로, 의례껏 그런 시절이었으니 문제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고 해도, 2023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들은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장 레옹 제롬이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선봉장 역할을 했으니까 그의 작품들은 가치가 없는가? 상당한 여성혐오주의자였던 ‘발레리나의 화가’ 드가의 작품들은 그러니까 무시해야 하는가? 여배우가 평생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을 만큼 폭력적 요구를 했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차지하는 영화사적 위치를 폐기해야 하는가? 미성년자에게 성폭력을 가했던 시인, 배우, 음악가가 남긴 모든 작품은 예술로서 의미가 없는가? 쉽지 않은 문제다.
각자의 신념에 따라 여기에 대한 답은 다를 수 있겠으나 과거 모든 예술가와 그들의 작품은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으며 애써 소중하게 남겨야 하는 인류의 기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동시에 냉정하게 따지고, 묻고, 돌아보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지금 개선하고 고쳐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 냉정하게 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예술교육과 지금의 예술 현장을 파악해야 옳다. 2023년의 우리들에게 논란이 되는 문제 대부분은 ‘여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미술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지만, 좁혀서 다음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과정이 있어야 장 레옹 제롬의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를 제대로 다시 볼 수 있다.
2022년 서울대 서양화과와 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의 신입생은 전원이 100% 여학생들이었다. 현재의 미술대학 성비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놀랄 일도 아니다. 2001년 미대의 남녀 구분 모집을 폐지한 이후, 2012년 전국 미대 입학생 중 여성이 약 72%였고, 2022년에는 74%였다. 미술교육 현장의 여초 현상은 20년 넘도록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거나 관련 정책을 결정하는 미술계 리더들의 남초 현상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다. 2010년 이전에는 미대 전체의 전임교원 중 여성은 28% 수준이었고, 2012년에는 32%, 2022년에 처음으로 39%가 넘었다. 수십 년 동안 국내 미술계에서 학습자는 여성이 많고, 이들을 가르치는 선생과 현장의 리더는 남성이 많다.
이러한 지형도가 가진 취약점은 성비위·성폭력 관련 사건의 지속이다. 지난 2017년, 예술활동증명을 완료한 예술인 12,673명을 대상으로 한 '문화예술계 성희롱, 성폭력 실태 조사'에서 예술인의 성추행(폭행·협박 미수반) 경험률(목격 포함)은 57.4%였다. 또한 3년마다 정부가 실시하는 '예술인 실태조사 보고서'의 2021년 자료에 따르면 “여성이 불평등한 처우를 받음” 응답은 26.8%였으며 연령이 낮을수록 ‘여성 불평등’ 응답이 높았다. 특히, 미술 분야로만 국한하여 데이터를 다시 보면 여성 불평등 응답이 29.4%로 더 높다. 이 문제는 다시 ‘도제식 예술교육’의 문제와 연결된다.
도제교육은 가내수공업 사회에서 시작되었다. 10세 전후의 아이들이 스승과 함께 거주하며 허드렛일을 하고 기술을 배우면서 선생이 되는 과정이었다. 20세기 전까지 '기술'이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의 교육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발레리나도, 화가도, 도공도, 악기 연주자도 도제교육으로 길러졌다. 그랬던 것이 큰 교실로 모두를 모아 가르치는 공교육의 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도제식 예술교육은 교실 밖에서 따로 형성되었다. 악기와 붓을 든 아이도, 스케이트나 축구화를 신는 아이도 학교 밖의 다른 공간에서 교육을 받는다. 실기력을 확인해야 하는 예체능 분야는 사교육이 필수적이다. 공교육에서 이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교육의 바깥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는 미성년자와 여성들은 어떤 시스템적 보호를 받고 있는가?
청소년과 여성은 보호받을 권리가 있고, 이를 위한 울타리는 필요하다. 그런데 도제식 교육의 울타리가 학생들을 위해 높은 게 아니라 선생, 교사, 코치를 중심으로 높을 때 문제가 된다. 예술을 위해서, 스포츠 대회 1등을 위해서, 음악 콩쿠르 우승을 위해서 ‘헛짓거리’를 해도 그러려니 여겨왔던 탓이다. 예술가니까 술에 취해 여성들을 만져도 되고, 항상 1등만 하는 국가대표니까 어쩌다 일탈해도 된다는 특혜 의식은 결국 예술가, 운동인이 특별하다는 인식이 보호막처럼 작용한 결과다. 화가도, 음악가도, 시인도, 운동선수도 모두 그저 어떤 직업인이다. 그리고 모든 직업에는 ‘직업윤리’가 있다. 의사라고 해서 함부로 환자의 몸을 만져서도 안 되는 것이며, 회사 사장이니까 직원 뺨을 때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이라고 해서 함부로 성적 표현을 해도 되는 것이 아니며, 1등으로 만들어주는 코치라고 해서 제자의 몸을 만져도 되는 것이 아니다. 직업윤리에 어긋남은 똑같은데 어쩌면 우리에게는 이중적인 잣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을 볼 수 없게 높게 세워진 울타리는 폐기해야 한다. 청소년과 여성을 위한 울타리만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을 담당하는 예술가, 음악가, 체육인 지도자들이 스스로 건강한 직업인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 덧붙여 예술교육을 받는 학생들도 예술가가 되려는 이유에 그 어떤 ‘신화’, 즉 자신이 특별하다는 환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다른 분야의 학생들과 똑같이 성실하고, 성가신 규제와 규율도 지켜줄 필요가 있다. 겉멋으로 성장판이 닫히면 안 된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가치와 트렌드에 순응하기는 쉽다.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하고 싸우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역사는 성공한 혁명을 기억한다. 그러한 까닭에 지금 21세기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직업윤리를 가진 예술가들만이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논란이 되는 '여성'의 이미지와 의미를 얼마나 고민했고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는 그래서 중요하다. 창작자의 입장이든, 감상자의 위치이든, 여성이 작품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거나 소비되는 객체라는 인식을 벗고, 능동적으로 창작하거나 감상하는 주체적 인간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20세기를 거쳐 21세기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고, 진행될 혁명이다. 여성은 수천 년 동안 그림 속 모델이었다. 직접 창작하는 예술가로 존재한 지 이제 겨우 100여 년에 불과하다. 비록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아를 만들었지만, 갈라테아가 첫 숨을 쉬는 순간부터 더 이상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다. 예술작품도 마찬가지다. 예술가가 만든 작품은 창작자와 무관하게 사회적-문화적 맥락 안에서 존재 의미를 갖는다고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등 많은 학자들이 강조했다. 여성이 뮤즈가 된 아름다운 누드 그림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조각상이 아니라 이제는 박동하는 생명을 가진 갈라테아, 이 사람의 자기결정권과 자유의지를 담아낸 그림은 앞으로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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