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을을 위한 예의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좋아하던 야구 구단이 다른 기업에 매각되었다. 말 그대로 하루아침에, 구단 직원과 선수들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오로지 오너들 간의 합의로 소유주가 바뀐 것이다. 팬들과 관계자들이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는 사이 새 구단주는 개인 채널에서 자신의 청사진을 펼치며 이런저런 호언장담을 했다. 지원이 풍부해진다면 구단에는 호재일 터이기에 매각을 환영하는 목소리도 상당했다. 그럼에도 나는 큰 배신감에 한동안 야구를 보지 않았다. 배신감보다는 정이 떨어졌다는 말이 좀 더 적확하겠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 논의와 결정이 오로지 모회사의 경영진 사이에서만 이뤄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꽤 자주 야구장으로 몰려갔었다. 우리는 유니폼을 입은 채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불러댔고,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은 가장 먼저 관중석을 향해 인사했다. 지면 구장 전체가 침울해졌고 이기면 다 같이 즐거워했다. 그리고 모두 맹목적으로 팀의 우승을 기원했다. 그러나 직원과 선수를 포함해 그 구장에서 울고 웃던 사람들이 모조리 배제된 매각 과정을 보며 나는 우리가 외치던 구호, 유니폼에 새겨진 로고, 부르던 구단 이름이 모두 돈을 대는 '기업'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다. 몰랐던 게 아닌데도 전날까지 입에 착착 감기던 구호가 갑자기 남의 이름처럼 낯설게 꺼끌거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제 와 갑자기 그때를 떠올리게 된 건 요 며칠 세간을 달군 SM의 경영권 쟁탈전 때문이다. 상황은 다르지만, 대주주만의 결정으로 회사의 방향이 뒤집혔다는 점에서는 모양새가 비슷해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이 겹쳤다. 언론은 이 다툼이 시장에 미칠 여파를 분석했고, 주주들은 주가에 촉각을 곤두세웠으며, 대중들은 누가 이기게 될지를 두고 설왕설래했다.
내 입장에서 가장 마음이 쓰인 건 그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을 구성원들이었다.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대주주의 사적 감정에 근거한 결정으로 회사의 비전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에 허탈감을 느끼는 SM 직원들의 글이 여럿 올라왔다. 몇몇 소속 아티스트들 역시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하지만 지분을 누가 먼저 선점하는지, 여론을 어떻게 장악하는지가 중요한 싸움에서 이들의 감정은 그다지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심지어 제3자들 중에도 그것을 곱게 보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허무함을 토로하는 직원들의 글에는 응원의 말도 달렸지만, '네 회사도 아닌데 누구 밑에서든 그냥 일하면 되지 자부심 대단하다'는 식의 조롱 섞인 반응도 적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슬퍼지는 건 누구도 '을'에게는 예의를 지킬 생각이 없어 보이는 까닭이다. 기업은 개인의 소유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 삶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일터다. 일 시키는 쪽이 '생각 없이 일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듯 일을 하는 쪽도 '나를 부품으로 여기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한다. 하물며 열정페이와 노동 착취가 가장 빈번한 엔터 업계에서 구성원의 자부심이 기업의 성취에 정말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왜 그 기여는 당연한 듯 무시되는 걸까.
이번 다툼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이 기억은 직원들이 가진 노동자로서의 자아에 큰 상처로 남을 것이고, 같은 을의 처지인 나로서는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