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소개가 어려우신가요?

입력
2023.02.16 22: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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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의 한 공간에서 열리는 책 모임에 다녀왔다. 친구의 소개로 가게 된 터라, 모임 장소는 책방이나 카페겠지, 대강 그렇게 짐작했다. 모임 당일, 낯선 공간의 입구를 못 찾고 헤매다가, 사전에 전달받은 안내 메시지를 다시 읽고서야 문을 찾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은은한 간접조명이 군데군데 켜 있고, 테이블엔 와인과 온갖 핑거푸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곧 친구와 나는 공간의 주인들로부터 자리를 안내받았다.

진행될 모임은 참가자 각각 '2022년 최고의 책'을 소개하고, 책 내용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었다. 시작 시간이 되자 진행자분이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자며 운을 뗐다. 자기소개라니. 그것은 예상 못 한 변수였다. 금방 내 차례가 왔고 긴장하며 이름 석 자와 오늘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간신히 했다. 친구도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제 이름은 ○○이고요. 이걸 왜 신청했더라, 아니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라며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벌써 이렇게 긴장되는데, 앞으로 대화를 어떻게 이어갈지 다소 걱정됐다. 모두의 자기소개가 끝나자 진행자분이 맨 처음으로 책 소개를 시작했다.

오히려 책 소개 시간으로 넘어가니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각자 준비한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모두 경청하고, 무언가 질문하거나 답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가져온 책들은 또 어찌나 다양한지. 여러 주제의 대화가 쉴 새 없이 오갔다. 과거나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비밀을 갖고 살아가는 것, 시와 문장, 공존하는 삶, 사랑과 행복 등등. 그렇게 이야기하다 보니 무려 네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시간이 주는 익숙함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소개 시간과 책 소개 시간이 어찌 그렇게 다를 수 있었는지 조금 신기했다.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말해야 한다는 점은 동일했으니 말이다. 다들 책을 소개하면서 "책 읽어보시면 더 잘 아시겠지만"이라는 말을 덧붙인 걸로 봐서, 아마도 책은 그 시간 이후에도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소개의 부담을 덜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책 소개는 책에 대한 간략한 설명일 뿐 책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요즘 들어 소개하기에 내가 너무 많은 나이를 먹었다고 느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그게 말하기만으로 가능한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이다. 자기소개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한마디 말로 내가 규정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 아닐까. 그러나 한편, 그날의 책 소개는 하나의 자기소개나 다름없었고, 그것으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고 대화하기에 충분했다.

모임이 열린 공간은 '로그아웃'이라는 키워드 아래, 공간 공유, 모임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소개말로는 어렴풋했던 공간도 모임 참여 후에야 더 명확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것도 단면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애써 미리 규정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으로 채워진 날이었다. 모임이 마무리되고, 친구는 방명록에 자문자답 식으로 이렇게 적었다. "Q. 내가 이걸 왜 신청했지? A. 이러려고 했지."

사람도 공간도, 알아가려면 결국 함께하는 시간이 필수적이다. 그러니 조금 덜 두려워하자. 어차피 순간의 나는 나의 극히 일부만 보여줄 수 있으니. 조급해하지 않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일도 있다.


김예진 북다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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