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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벌, 그 이후에도 책임은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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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드라마 '더 글로리' 이야기를 하고 온갖 유행어와 2차 창작 콘텐츠가 쏟아져도 열심히 피하고 있다. 해당 드라마가 싫어서는 아니고, 원체 스릴러 장르에 취약한 데다가 결말까지 기다릴 성정이 못 되어서 완결이 난 이후에나 슬쩍 볼까 싶은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이미 현실에 충분히 잔혹한 일들이 많은데 드라마까지 고통받으며 봐야 하나 싶어서 아예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하지만 주로 하는 게 젠더기반폭력 예방교육이다 보니, 마냥 외면할 수가 없다. 드라마 속 이야기는 전해 듣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정도로 끔찍하지만, 항상 현실은 그보다 더 지독하기 마련이다.
각종 성폭력, 성희롱, 가정폭력, 성매매와 관련해 쏟아지는 뉴스를 보다 보면, 정말 세상이 나아지고 있기는 한 걸까 의문이 생기고, 가해자를 응징해서라도 정의를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곧잘 든다. 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비슷하리라 생각된다. 폭력은 흔하고,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경우는 드문 현실에서, 미디어를 통한 복수극이 많은 사람에게 인기를 끄는 건 당연할지 모른다. 잔혹하고 처절한 복수, 그렇게라도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 앞에서, '복수는 덧없다'거나, '용서가 필요하다'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래도 교육자의 정체성으로 '복수'나 '응징' 같은 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강단에서만큼은 어떻게든 더 건설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로 '예방'에 관한 논의가 이어질 수 있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다 비슷한지 폭력 사례를 들려주면 가해자가 어떻게 됐는지 묻고, 교육 내용에서도 어떤 말이나 행동이 처벌받으며 그 처벌 수위는 어느 정도인지에 관심이 더 많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마련에서도 '처벌 강화'는 단골 답변이다. 그럴 때마다 처벌을 강화하고 있는 현실과 그것이 시사하는 점 등 사회구조 문제로 논의를 끌어가기 위해 애쓰지만, 이야기는 자주 되돌아가 처벌 근처에서 머물렀다. 그건 일종의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를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책장을 덮고 편안하게 마침표를 찍기 위한, 꽉 닫힌 결말이 주는 안정감을 바라는 마음이랄까.
그러던 차에 성폭력 가해 청소년 교육을 의뢰받았다.
성폭력 가해 청소년 교육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44조'에 따라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교육 수강명령을 받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다. 대상자들은 인터넷에서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건부터 불법촬영물 시청, 강간 등 각종 성범죄로 법원에서 교육 수강명령을 받은 청소년이었다. 개인적으로 교육 활동을 시작하며 꼭 다뤄야 하는 대상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래도 사람인지라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 대상이기도 해서 주저 끝에 승낙했다. 기왕 맡은 거 잘하고 싶은 마음과 대체 어떤 이들을 만나게 될까 두렵고 복잡한 심정으로 악착같이 강의안을 준비했고 강의 전날에는 온갖 극단적인 꿈에 시달렸다. 긴장으로 앙다문 턱을 풀고 애써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들어간 그곳에는 놀라울 정도로 어떤 반전도 없었다. 일부는 유치한 기싸움하는 버릇을 못 고쳤고 또 일부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개중 어떤 이들은 다른 곳에서 만났으면 분명 꽤 친해졌을 법한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냥 평범한 교실의 청소년 모습 그 자체였다. 교육이 끝나고 한 청소년은 소감으로 성평등 교육이 평소 학교에서 얼마나 진행되는지를 물은 뒤 이런 교육을 조금 더 빨리 들을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오롯이 그 청소년뿐만은 아니어야 했다.
그러니까 조금은 관상 같은 것을 믿기도 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흉악한 범죄자들의 신상 공개가 될 때면 댓글에는 '생긴 것부터 싸하다'는 식의 이야기가 흔했고 거기에 적극 동조할 수는 없어도 못내 눈빛 같은 걸 보며 께름칙하다고 느끼곤 했다. 다시 생각하면, 그건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저런 사람을 구분할 수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라는 착각이자,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바람 같은 거였다. 처벌을 더 강력하게 이야기하면서 흉악한 가해자와 천진무구한 나를 가로지르는 또렷한 선을 긋기도 했다. 그렇게 벽을 세울수록 처방도 간단명료해졌다. 처벌과 더 강력한 처벌! 마술쇼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면 사라지는 토끼나 비둘기, 사람처럼 처벌을 휘두르면 범죄도 문제도 휙 사라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실상 사라지는 건, 내 관심뿐이었는데 말이다.
현실은 나와 상대를 가로지르는 선 따위는 존재한 적 없고 눈코입 모양으로 악인을 예측하고 구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더군다나 사이다 같은 복수 후 막이 내리고 책장이 덮이듯 끝나는 일도 없다.
지난 '#00_내_성폭력' 고발과 'ME TOO 운동'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었나? 우리 사회 일상에 만연했던 성폭력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어 그것이 비단 악마 같은 '일부' 가해자, 불운한 일부 피해자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성차별적이고 위계적인 젠더권력의 문제임을 직시하게 했다. 점점 더 많은 가해자가 수면 위로 드러날수록 가해자를 손가락질하며 타자화하기 위해 악착같이 다른 점 찾기 하던 눈과 손은 머쓱해졌다. 실로 개중에는 많은 이가 존경하던 사람, 좋아하던 연예인,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보다 더 열심히 살지도 않았고 유난히 더 사랑받지도 않았으며 특별히 더 친절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내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차고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다. 가해 청소년 교육을 통해 그래도 조금이나마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하며 남아 있던 일말의 기대마저 사라졌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 그것은 저주도 위로도 아니다.
나와 같은 존재가 조금이나마 더 안전한 세상에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는 계속해서 더 너른 안전망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또 다른 나와 같은 존재가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끔 예방하는 것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우리는 앞서 언급한 많은 사건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몰랐다거나 실수라고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책임을 빙자해 문제를 외면하고 도피하는 모습을 봤다. 또 많은 이가 어떻게든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책임하게 뻔뻔한 모습을 보이는 광경 역시 흔했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물론이고 그를 아끼던 사람, 공동체를 이루던 사람들의 상처는 봉합될 줄 모르고 커져만 갔다. 간신히 처벌을 받아도 마찬가지였다. 처벌과 사과는 지난 행동을 책임지는 하나의 매듭일 뿐, 모든 문제를 푸는 만능열쇠가 아님에도, 그저 한 번 못 이겨 사과하고 이를 면죄부처럼 흔들어대거나 처벌을 받았으니 된 거 아니냐며 철면피처럼 굴면서 어렵게 만들어진 회복의 기회를 산산조각 내는 때가 많았다. 이러한 파국은 단지 개개인의 부도덕과 무책임, 무지 때문만이 아니라, 가해와 처벌 그 이후를 상상해 본 적 없는 우리의 빈곤한 경험에 기인한다. 그래서 이제는 나와 같은 존재가 잘못된 선택을 한 이후의 이야기가 더 필요하다.
마땅한 방법을 제시할 능력도 자격도 없으니 강의 때 자주 이야기하는 사례로 마무리해 보려 한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다하는 모습이란 무엇인지 감명을 준 흔치 않은 사례다. 주인공은 한 중년 배우로 내가 이 배우를 뇌리에 담게 된 계기는 영화 작품보다 '물의'를 일으키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였다. 한 공적인 자리에서 농담이라고 던진 여성혐오적인 말이 수많은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며 문제가 되었고 나는 으레 여느 다른 문제 행동을 한 사람들처럼 내 기억과 스크린에서 사라지겠거니 했다. 그런데 이 배우 행보가 예상과 많이 달랐다. 일단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사건을 뭉개지 않고 다음 자리에서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상당히 드문 경우인데 그 이후 행보가 더 신기했다. 팬들이 보내준 페미니즘 책을 읽으며 인증샷을 올리는 등 계속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자신의 과오에서 반성과 성찰을 거쳐 훌쩍 성장하더니 급기야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보아도 손색없는 영화를 찍으며 자신의 공부가 그저 보여주기식이 아님을 증명해 보였다. 바로 영화 '추격자'로 익숙한 배우 김윤석과 그가 감독한 영화 '미성년'의 이야기다.
나는 늘 교육 말미에 이 사례를 언급하며 참여자들과 함께 책임지는 자세, 특히 '잘못된 선택을 한 이후, 그 잘못을 마주하고 책임지는 자세란 무엇일까'를 묻는다. 단지 한 번의 유려한 사과문이나 처벌로 그치는 것이 아닌, 일생에 거쳐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과정, 쉽지 않지만 그게 우리와 같은, 조금씩은 모나고 때로는 실패하며 상처받기도 하는 평범하고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로부터 일상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확실하고 빠른 방법이라 믿는다. 손가락질은 쉽고 처벌과 응보에 대한 이야기는 흔하며 책임은 드문 요즘, 우리에게는 처벌 이후의 책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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