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금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건축가의 본능일까. 건축가 남편 박성일(39) 선아키텍처 소장은 오래전 이왕이면 직접 설계한 집에 정착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다. 20년을 함께해 온 아내 김진경(39)씨는 남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현실적 어려움을 저울질하며 묵묵히 지켜봤다. 미묘한 균형감을 유지했던 저울추는 의외로 쉽게 기울었다. 한창 뛰놀 때인 다섯 살 아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질 무렵, 아내가 직장을 잠시 쉬게 되면서다. 서울 강동구에 있는 남편의 사무실로 출퇴근이 가능한 반경 30㎞ 내외 근교에 집을 짓자는 목표를 세우고 땅을 보러 다니던 부부는 2020년 봄날, 가까이엔 앞집의 만개한 목련꽃이, 멀리로는 연둣빛 봄산이 보이는 작은 땅에 반해 인연을 맺었다. 그 후 몇 개월 동안 남편은 묵묵히 오랜 계획을 실행해 나갔다. 경기 양평군 문호리의 조용한 전원주택, 말 그대로 지우네 세 식구가 사는 '지우네 집(대지면적 365㎡, 연면적 139.15㎡)' 얘기다.
눈으로 자연을 품은 집
주택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형태로 튀는 색 하나 없이 완성됐다. 오직 포인트가 되는 것은 집을 둘러싼 풍경이다. 마당과 자연의 전망을 끌어안기 위한 'ㄱ'자 형태로 앉혀진 집은 계절에 따라 풍광도 즐길거리도 확확 달라진다. "전원주택을 택한 이상 원하는 바가 확고했어요. 가족이 아무 때나 마당으로 나와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공간, 경치를 오롯이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했죠."
단연 시선을 끄는 것은 집 전체에서 보이는 앞산이다. 박 소장은 "산 뷰(view)를 최대한 확보할 수 있도록 처음부터 앞산 방향을 중심으로 평면을 계획했다"며 "길과 접한 바깥으로 등을 지고 산천을 향한 안쪽은 최대한 넓게 열어 놓은 배치"라고 설명했다.
자연을 바라보고 앉은 집의 자세 덕분에 집안 어디에 머물건 탁 트인 개방감을 만끽할 수 있다. 산을 향해 떡 하니 자리 잡은 마당은 말할 것도 없고, 1층에 넓게 마련된 주방과 다이닝 공간, 거실에선 통창을 통해 주변 풍경이 파노라마로 쏟아져 들어온다. 현관과 인접한 남편의 작업실 역시 산과 마당이 어우러지듯 그림 같은 차경으로 담긴다.
침실과 서재, 아이방으로 구성된 2층 역시 주변 풍경과의 시각적인 소통을 가장 신경 썼다. 계단을 올라 복도로 들어서면 시선이 자연스럽게 복도 끝에 위치한 안방의 코너 창으로 향하는데, 공간을 이동하는 찰나에도 이 집의 장점인 자연 풍경을 즐기게 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담겼다. 주변 건물을 시야에서 지우고 녹음만 담기는 크기로 코너창을 낸 안방에선 오직 숲의 풍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한다. "디자인을 최대한 덜어내고 풍경은 최대한 풍만하게 담으려 했죠. 결과적으로 너무 만족해요. 산을 바라보면서 사는 게 이렇게 좋은 줄 예전엔 몰랐거든요."
과감하게 덜어내고 신중하게 더하다
가족에게 꼭 필요한 요소를 채우되 '최소한의 디자인'이라는 지론을 녹여 해석한 주택은 안과 밖이 판이했다. "겉은 촉촉하고 속은 바삭한 '겉촉속바' 스타일"이라는 박 소장의 설명처럼 겉모습은 은은하고 따스한데 내부는 재료 그대로의 물성을 살린 거친 정취가 그득하다. 자연 가까이에 있지만 가족이 아파트에서처럼 안심하고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가장의 바람과 건축가로서의 기능적·디자인적 실험을 녹여낸 결과다.
밝은 아이보리색 벽돌 타일로 마감한 외관과 자갈을 채운 폭신한 마당은 가정집답게 아늑하다. 갈바늄 강판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담장을 만들고 문 앞에 작은 정원을 조성한 집의 첫인상 역시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모습이다. 실내엔 노출 콘크리트와 목재, 철제 같은 날것 그대로의 재료들이 자리 잡고 있다. 재료의 촉감이 드러나면서 원초적이고 거친 분위기를 낸다. 박 소장은 "본래 건축 작업을 할 때 잘 사용하는 재료가 콘크리트"라며 "보통은 주택 외관에 사용하지만 단순한 형태를 살리면서도 따로 마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살려 실내에 적용해봤다"고 설명했다. 바닥을 상업 공간에 주로 쓰는 에폭시로 마감한 것이나 계단 형태를 그대로 살려 디자인한 검은색 철판 계단 역시 주택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요소다.
건축적으로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패시브 주택(초단열 주택)이었기에 에너지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도 여럿 추가됐다. 노출 콘크리트로 축열 성능을 올려 단열 효율을 높이고, 남쪽으로 낸 창에는 에너지 효율을 따져 처마와 차양을 더했다. 디자인을 최대한 단순한 형태로 설계한 것 또한 열효율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라고. 1층과 2층은 작업실을 제외하고 직사각형 평면이 같고, 화장실과 다용도실을 제외한 모든 벽체를 가벽으로 구성했다.
건축주와 건축가, 반반의 마음으로 집을 지으면서 '기본'과 '실험'이라는 상반된 목표를 완수해 낸 박 소장. 땀과 눈물이 뒤섞인 지난 작업을 떠올리던 그는 "부지의 조건과 예산, 건축가로서의 욕심을 엮어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면서도 "건축주 자아와 건축가 자아가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과정이 흥미로웠고, 요즘은 우스갯소리로 3년에 한 번 우리 집을 지어보면 어떨까 말하고 다닌다"고 웃었다.
꿈과 일상이 쌓이는 건축가의 집
자신이 설계부터 시공, 감리까지 도맡아 완성한 집에서 산 지 일 년 남짓. 박 소장은 진정한 공간은 사는 사람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특히 가족 모두가 두고두고 애정하는 마당이 그렇다. 초보 주택 생활자의 두려움이 앞서 잔디가 아닌 마사토를 깔고 수목 대신 마른 그라스를 심은 심플한 마당을 만들었는데 의외로 가장 활용도가 높은 공간이 됐다는 것. 볕이 잘 드는 마당 한쪽엔 작은 텃밭을 만들어 식물을 심어 수확의 소소한 재미를 즐기는가 하면 봄·가을엔 캠핑장으로,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사철 활용할 수 있어 일상의 즐거움이 배가 됐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사람에 따라 쓰임이 무궁무진해지는 공간이 좋은 공간이라는 점을 느껴요. 집을 짓고 살면서 주택의 덕목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죠."
자연을 적극 끌어들이고 그 일부가 된 집. 갑갑한 마스크를 벗고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는 공간이 귀했을 때 집은 그 자체로 가족에게 소중한 쉼터였을 터. 아내 김씨는 모두의 일상이 멈추었던 시간 동안 이 집에서 이어간 특별한 일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는 그 이야기를 모은 에세이집 출간을 준비 중이다.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평범한 하루를 살고 있어요. 달라진 점이 있다면 아침 공기를, 오후의 햇살을, 밤의 고요함을 너무나 쉽게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집에서 살아보려고 해요. 삶이 더 깊고 넓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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